[제14회 LG배 세계기왕전] 백 난조(亂調)

〈제10보〉(120~132)=바둑만큼 전국을 명료하게 조망할 수 있는 게임도 흔치 않다. 돌들이 정지된 상태로 고스란히 실체를 보여준다. 문제는 형세를 정확히 읽어내는 정밀한 계산력이다. 당대의 고수(高手)들조차 기분에 치우쳐 형세를 오판할 때가 잦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최철한은 초반 좌변에서 사경에 처했던 백돌들이 14점이나 되는 적병(敵兵)들을 때려잡고 생환하면 무조건 이긴다고 봤다.

그러나 오판이었다. 우변 백진을 폭파하고 선수(先手)까지 잡은 흑이 여전히 대세를 장악하고 있다. 흑▲ 붙임 때 또다시 120이란 방향 착오가 등장했다. 뒷문 열린 쪽은 집이 안 된다는 건 상식이다. 참고도 1로 젖혔으면 불리하나마 버텨볼 만했다. 124는 승부수지만 흑은 125 큰 곳을 챙기며 흔들리지 않는다.

128에도 초조함이 배어 있다. 결과적으로 '가'에 호구침만도 못했다. 129, 131을 당하니 응수가 보이지 않는다. 131은 강수로, 그 배경엔 흑 '나'가 항상 선수란 든든한 믿음이 감춰져 있다. 하변이 통째로 흑의 수중에 들어간다면 도무지 해 볼 데가 없어질 것이다. 그 와중에도 백은 나름대로 우변 흑 일곱 점의 목숨을 은근히 노리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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