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분석] 주택담보대출 금리 인하 '눈가리고 아웅'

주요 시중은행들이 올 들어 정부의 압박에 밀려 잇따라 주택담보대출 금리를 인하하고 있지만 대출자들이 전혀 효과를 체험하지 못하고 있다. 은행들이 금리인하 대상을 신규대출로 제한한데다 은행 창구조정을 통해 실질적으로는 금리를 내리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기존 대출의 금리는 더 오르면서 대출자들의 불만이 커지고 있다. 이에 따라 시중은행들의 금리 인하가 '눈가리고 아웅'하는 식의 빈껍데기 쇼가 아니냐는 비판도 나온다.

◆시중은행들 신규대출 금리 인하

시중은행들은 이달 4일 국책은행인 기업은행을 시작으로 금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기업은행에 이어 국민·신한·우리·하나은행 등 주요 시중은행이 동참했고, 외국계 은행인 외환은행과 SC제일은행까지 참여했다. 적게는 0.2% 포인트부터, 많게는 0.5% 포인트까지 금리를 내렸다.

금리 인하의 배경은 주택담보대출의 기준 금리인 CD(양도성예금증서) 금리가 지난 1년 반 사이에 연 6%에서 연 2%대 후반으로 급락한 반면, 주택담보대출 전체 금리는 평균 20%밖에 하락하지 않자 금융 소비자들의 불만이 커져왔기 때문이다. 게다가 친서민 정책을 펼치고 있는 정부가 서민가정의 주택담보대출 이자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은행권에 직접적인 금리 인하 압박을 가하자, 은행들이 마지 못해 금리를 내리는 양상이다.

◆기존 고객은 혜택 없어

지난해 상반기에 1억원의 주택담보대출을 내 서울 사당동에 아파트를 마련한 직장인 김영규(37)씨는 연초 은행들의 금리 인하 소식을 듣고 '내 대출 금리도 내리겠거니'하고 은근한 기대를 했다. 하지만 최근 그의 월급통장에서 빠져나간 이자는 49만원으로 석 달 전보다 오히려 5만원 정도 올랐다.

은행들이 금리 인하를 하면서 '신규 고객에만 적용된다'는 단서를 달았기 때문이다. 새로 주택담보대출을 내는 사람이나, 기존 대출을 연장하면서 계약을 갱신(更新)하는 고객들에게만 0.2~0.5% 포인트의 금리를 인하해준다는 것이다. 결국 기존 고객들에게는 아무런 혜택이 없다는 얘기다.

오히려 최근 기준금리인 CD금리가 오르면서 이달에 금리 변동 주기(보통 3개월)를 맞는 대출자들은 금리가 대폭 오르는 황당한 경험을 하고 있다. 지난해 10월초 연 2.7%였던 CD금리가 지금은 연 2.88%로 올랐기 때문이다.

새로 대출을 갈아타기도 어렵다. 김씨는 "은행 서너 군데에 신규대출을 문의해 봤다"며 "연초에 은행들이 금리를 조금 내렸지만 지난해 금리가 워낙 많이 오르는 바람에 작년 상반기의 첫 대출 때보다는 요즘 신규대출 금리가 훨씬 높았다"고 말했다.

◆신규 고객도 금리 인하 효과 없어

그렇다면 새로 대출을 내는 진짜 신규 고객들은 금리 인하 효과를 느끼고 있을까. 은행들은 표면적인 대출 금리는 낮췄지만, 대출 현장에서 적용되는 '창구 금리'는 요지부동이다.

일부 은행들은 은행 지점장이 주택담보대출을 낼 때 금리를 일부 할인할 수 있도록 해주는 '전결 금리' 권한을 없애버렸다. 과거에는 지점장이 대출 확보를 위해 은행별로 0.1~0.5% 포인트까지 금리를 깎아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이 길이 막혀버린 것이다.

또 일부 은행들은 각 대출자에게 적용하는 신용리스크 평가표를 바꿔, 주택담보대출 금리 범위 내에서 낮은 금리를 적용받을 수 있는 사람들을 줄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 서초구의 B시중은행 지점 관계자는 "현재 대부분의 은행 주택담보대출 금리는 지점이 아닌 본점의 이른바 '여신관리센터'에서 정해주는데, 대출 신청을 해서 금리가 승인되어서 나오는 것을 쭉 보면 금리를 내렸다는 느낌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올해 대출 만기(보통 3년 이상)를 맞아 새로 대출을 연장하는 사람들이 가장 극심한 금리 상승을 경험하고 있다. 3년 전인 2007년과 비교해 CD금리는 3~4% 포인트나 내렸지만, 은행의 가산금리는 2007년 평균 1.18%에서 작년 말 3.07%로 급등했다. 이들은 최근까지 연 3~5%대의 이자를 내왔는데, 새로 대출 연장을 하면 연 5~7%대의 이자를 내게 된다.

◆시장 경쟁으로 해결해야

시중은행들의 주택담보대출 금리 인하 움직임은 정부의 압박 때문이다. 정부의 압력에 밀려 은행들은 겉으로는 금리를 내리는 것처럼 하고, 속으로는 시치미 뚝 떼고 받을 금리 다 받는 영업을 하고 있다. 부동산 시장 침체로 수요가 줄고 있는 주택담보대출 금리는 내리는 척하고, 신용대출금리는 내리지 않는 '배짱'도 보이고 있다. 이번 금리인하에서 서민 대상 신용대출 금리를 인하한 곳은 기업은행뿐이다.

다만 실질적인 금리인하가 진행되는 부문도 있다. 고정금리 및 10년 이상 장기 주택담보대출 부문이다. 주택담보대출을 고정금리로 공급하는 주택금융공사가 최근 이 부문에서 공격적인 금리 인하와 대출 확대에 나서자 시중은행들이 경쟁에 밀려 잇따라 금리를 내리고 있다. 고정금리가 변동금리보다 높은 일반적 현상이 깨지는 사례도 나오고 있다. 이 때문에 시중은행들의 금리인하가 실효를 거두기 위해서는 정부의 압박보다는 시장경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