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초 스포츠 스타 소재 개인전 여는 함영훈씨

서울 반포동 도요타 서초전시장 2층. 이곳에서 열리고 있는 함영훈(38)씨의 개인전 ‘이야기를 시작하다 - 감동展’에는 스포츠 스타들을 소재로 한 50점의 아크릴화가 걸려 있다. 그 중에는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에서 황영조 선수가 몬주익 언덕에서 일본의 모리시타 선수를 제치는 장면,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 출전한 박태환 선수의 스타트 장면 등을 표현한 그림들도 있다.

국내 최초로 ‘스포츠 스타’들을 소재로 삼은 전시회다. 전시 홍보를 맡은 김연수(37)씨는 함씨를 두고 “운동을 좋아하고 많은 운동선수들과 호형호제하는 사이여서 작가인지 선수인지 헷갈릴 때도 있다”고 했다. 함씨는 “미대에 진학하기 전까지 유도선수로 활동했다”며 “지금도 웨이트 트레이닝, 산악자전거 등을 꾸준히 하고 있다”고 말했다.

1999년 데뷔한 함씨는 ‘아침에 일어나 마시는 커피’처럼 일상적인 소재를 다룬 그림이나 추상화를 주로 그렸다. 그러다 14번째 전시회인 이번 개인전에서 처음으로 ‘스포츠 스타’를 소재로 삼았다.

스포츠 스타를 소재로 삼은 이유를 묻자 그는 “인생의 굴곡, 그 중에서도 환희와 감동의 순간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는 이를 ‘그루브(groove)’라고 표현했다. 그는 “그루브는 음악적으로 흥겨움, 즐거움이라는 뜻도 있지만, ‘굴곡’을 뜻하기도 한다”고 했다.

“레슬링은 겨우 6분, 비교적 경기 시간이 긴 마라톤도 2시간이면 끝이에요. 스포츠 스타들은 이 짧은 시간에 환희와 감동을 보여주지만, 그 뒤엔 고통과 인내가 있죠. 그런 그들의 모습이 굴곡진 인생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했어요. 전부터 ‘그루브’를 표현하고 싶었는데, 이제야 적절한 소재를 찾은 셈이죠.”

스포츠 스타를 소재를 택한 것은 그의 가족사와도 무관하지 않다. 그의 작은 할아버지는 1950년 보스턴마라톤 우승자인 함기용(78)옹(翁)이다. 국제 마라톤 대회에서 태극기를 가슴에 달고 우승한 최초의 한국인이다. 그는 “작은할아버지의 삶에서 힌트를 얻었다”며 지난번 개인전에 선보였던 그림 두 점을 보여 줬다.

첫 번째 그림에서는 가슴에 ‘KOREA’가 적힌 옷을 입은 소년이 웃고 있었다. 함씨는 “대회 전날 마지막 연습을 하는 작은할아버지의 모습”이라며 “할아버지는 우승하고 고국에 돌아오면 카퍼레이드가 열릴 줄 알았다고 말씀하셨다”고 했다.

하지만 고국으로 돌아온 우승자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6·25전쟁이었다. 함씨는 “할아버지는 체육복과 금메달을 동대문운동장에 파묻고 피난을 떠났다”며 “2007년 보스턴마라톤 위원회에서 똑같은 금메달을 제작해 줬지만, 당시 묻은 메달은 찾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가 보여준 두 번째 그림에는 어둠 속에서 팔에 금메달을 건 선수가 고개를 숙이고 있다. “민족사 때문에, 금의환향을 기대했던 할아버지는 금메달조차 찾지 못하게 되고 말았죠. 스포츠 스타들의 삶에는 이처럼 영광과 좌절이 교차하는 것이 아닐까 싶어 작품의 소재로 삼게 됐습니다.”

그는 할아버지를 통해 황영조 선수를 만날 수 있었다. 황 선수로부터 “대관령에서 훈련할 때 너무나 고통스러워 달리는 고속버스에 뛰어들고 싶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몬주익의 영웅’이 탄생하던 감격의 순간에 대해서도 생생하게 들었다. 스포츠야말로 자신이 찾던 소재라고 확신하게 됐다.

그는 “소재는 할아버지로부터, 소질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다”고 말한다. 그의 아버지는 ‘한지작가’ 함섭(68) 씨다. 마라톤 선수를 꿈꿨으나 체격 조건 때문에 그만두고 미술의 길로 접어든 아버지 덕에 함씨 집에는 하루 5∼10권의 도록(圖錄)이 배달됐고, 그림을 배우는 학생들도 자주 드나들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미술을 가까이 접한 탓인지, 나도 자연스럽게 미술을 전공으로 택하게 됐다”고 했다.

그의 작업은 스포츠 스타의 사진에서 시작된다. 사진을 구하기 위해 촬영팀과 동행하기도 한다. 마음에 드는 사진을 정하면 선수와 인터뷰를 한다. 당시 느꼈던 감정과 상황에 대해 듣다 보면 자연스레 친분도 쌓인다.

작품에는 이렇게 알게 된 선수의 진면목을 최대한 반영하려 노력한다. 레슬링 선수 심권호의 경우, 의료용 합성수지로 만든 어금니 모형 6000개가 두 가지 색깔로 모자이크처럼 촘촘히 붙어 있다. 그는 “어금니를 악물고 훈련한 심 선수를 표현하고 싶었다”며 “두 번의 올림픽에서 두 체급의 금메달을 땄기 때문에 두 가지 색깔로 표현했다”고 했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선수들은 대부분 밝은 표정을 하고 있다. 목표를 달성한 직후의 짜릿한 표정도 있다. 그는 “인생에는 굴곡이 있지만, 좌절의 순간보다는 환희와 감동의 순간을 표현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역도의 이배영 선수가 환하게 웃는 그림을 가리키며 “이 선수가 그림을 보고 고맙다고 말해줬다”고 했다. 처음엔 바벨을 놓치며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선택했다. 하지만 그는 “이 선수의 별명이 ‘미스터 스마일’이다”라며 “별명처럼 밝게 웃는 모습을 그려서 희망을 주고 싶었다”고 했다.

“베이징올림픽 펜싱 은메달리스트 남현희 선수도, 저는 밝은 모습으로 표현했어요. 나중에 남 선수가 ‘결승전에서 지고 난 장면이 아니라, 득점하는 장면을 그려 줘서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고 하더군요.”

함씨는 ‘감동展’에 이어 ‘도전展’과 ‘열정展’을 계획하고 있다. 그는 “레슬링에 문희제라는 선수가 있는데, 유독 올림픽에서만 금메달을 못 따서 계속 도전하고 있다”며 “문 선수처럼 끊임없이 도전하는 선수들의 모습이 좋은 소재가 될 것”이라고 했다. ‘열정展’에 대해서는 “박찬호 선수처럼 끊임없는 열정이 돋보이는 선수들을 다루고 싶다”고 말했다.

함씨는 “이번 전시회를 통해 유도의 최민호, 리듬체조의 신수지, 축구의 김남일 선수 등이 모델 요청을 해 왔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선수 19명을 모델로 50점의 작품을 전시했어요. 마지막 ‘열정展’에서는 60명의 선수를 소재로 한 150점의 작품을 예술의 전당에 전시하는 것이 목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