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 예술작품·전시공간… 공사판 가림막의 산뜻한 변신

지난 22일 구(舊) 서울역사를 문화공간으로 개조하는 공사장 가림막 앞. 영하 10도를 밑도는 강추위 속 매서운 바람에 바삐 발걸음을 옮기던 몇몇 행인들이 멈춰 서서 신기한 듯 가림막을 둘러보고 있었다.

지난해 8월부터 문화체육관광부가 구 서울역사 가림막에 설치한 '거리의 사진전'이다. 이 전시는 1900년 10평짜리 허름한 목조건물이던 서울역을 시작으로, 1928년 무용가 최승희가 경성 공연을 위해 도착한 직후 모습, 지방에서 상경한 승객들에게 살충제 DDT를 뿌리는 사진, 서울역 고가도로 준공식에 나란히 선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 1987년의 민주 항쟁 등 서울역을 배경으로 한 70여장의 사진을 통해 근·현대사의 애환을 보여주고 있다.

문광부는 전시를 위해 미 주간지 라이프에서 사진을 구입하기도 했다. 인천에서 올라온 김모(39)씨는 "옛날에 서울역이 이랬어요? 다시 보니깐 새롭네"라며 웃었다. 노모(49)씨는 한 사진을 가리키며 "이건 서울역 뒤 윤락가로 여성이 팔려가는 걸 막으려고 경찰들이 지키고 있던 광경"이라고 말했다.

서울시내 곳곳에 들어선 공사장 가림막의 역할이 다양해지고 있다. 하얀 천에 '안전제일'이라는 녹색 글자만 덩그러니 적힌 가림막은 이제 찾아보기 어렵다. 내로라하는 작가들이 공사장 가림막을 예술 작품으로 만들기도 하고, 구 서울역사처럼 미술관으로 탈비꿈시키기도 한다. 자치단체들의 정책 홍보수단이나 기업 브랜드·제품 홍보를 위해 활용되기도 한다.

◆도심 경관 살리는 '거리의 미술관'

마포구 상암동 DMC(디지털미디어시티)에는 거대한 '거리 미술관'이 설치되어 있다. 총 7.2㎞의 공사장 가림막에 총 15명의 작가와 예술 대학 졸업생 150여명이 6개월간 작업 끝에 완성한 '작품'이다. 지하철 6호선 디지털미디어센터역 2번 출구부터 시작되는 이 전시회는 뜨개질로 태양을 형상화한 작품, 철로 만든 거대한 개미, 다양한 색의 피아노 건반 등 각각의 개성을 담은 작품들이 펼쳐진다. 프로젝트를 총괄한 한미애 중앙대 겸임교수는 "DMC에 들어서는 첨단 미디어의 새로움을 표현하기 위해 프랑스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의 4대 원소(물·불·바람·흙)에 미디어를 뜻하는 빛을 더한 5원소를 작품의 콘셉트로 삼았다"며, "대부분 가림막에 조각 같은 것을 붙여 입체적으로 표현했다"고 말했다. 이호진(23·마포구 상암동)씨는 "각각의 작품이 미술관에 걸어놓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훌륭해 전혀 색다른 느낌"이라고 말했다. 서울시 박중권 투자유치담당관은 "'최장 거리 미술관'으로 기네스북에 신청했다"며 "공사장 가림막이 젊은 작가들의 일거리를 만들고 시민들의 본격적인 예술공간으로 변모한 모범 사례"라고 말했다.

한국에서 공사장 가림막에 예술가가 뛰어들기 시작한 건 설치미술가 양주혜 고려대 교수가 1989년 프랑스 문화원 공사장 가림막인 흰 천에 색색의 점을 찍어 단순하지만 독특한 작품을 선보이면서부터다. 양 교수는 일신방직 사옥공사 현장의 바코드 작품, 광화문의 철거 당시 공사장 가림막, 최근 완성된 부산 광복동 공사장 가림막 등 8건의 작품을 선보이며 '가림막 작가'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는 "삭막한 공사장이 도시 경관을 파괴하는 게 가슴 아파 가림막 작품을 제의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