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분석] '군살' 대신 '새살' 잘라… 빗나간 공기업 구조조정

코트라(KOTRA) 동남아지역 해외무역관에서 근무하던 차장급 직원 A씨는 지난 연말 본사로부터 소환 명령을 받았다. 보통 해외에 나가면 3~4년 근무하는데, A씨는 임기를 못 채우고 조기 소환된 것이다. 이유는 직무 평가에서 2년 연속 하위 5%에 들었기 때문. A씨는 이달 초 '6개월 재택근무' 조치를 받았다. 현재 코트라에서 A씨처럼 재택근무 중인 사람은 모두 3명. 이들은 주어진 과제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해야 하며, 보고서가 인사위원회를 통과하지 못하면 퇴직해야 한다. 코트라 관계자는 "재택근무 제도는 2004년 도입됐지만, 실제 시행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3년 안에 전체 직원의 5%인 33명을 감축해야 하기 때문에 이 제도를 시행하게 됐다"고 말했다.

한국거래소도 정원(750명)의 10%를 감축하고 직원 임금을 5% 삭감하는 구조조정을 진행 중이다. 이를 실행하기 위한 '개혁추진단'도 구성했다. 거래소는 최근 18명의 임원 가운데 절반의 사표를 수리했다.

최근 공공기관들이 인원 감축과 임금 삭감 등 구조조정에 나서고 있다. 정부가 2008년 8월 발표한 '공공기관 선진화 추진 계획'에 따른 것이다. 하지만 자산 매각과 기능 조정 등의 작업은 지지부진한 가운데, 구조조정이 인원·임금 감축에 집중되고 있다. 또 일부 기관에서는 기존 직원들의 자리보전을 위해 신규채용을 미루거나 신입직원들의 임금을 깎는 등 부작용도 나타나고 있다.

◆인원·임금 감축은 속도 내고 민영화는 지지부진

한국전력공사는 지난 21일 147명의 명예퇴직을 실시했다. 퇴직자 가운데 차장(3급) 이상 간부는 25명, 직원은 122명이다. 한전은 앞서 지난 2008년 말 마련된 공공기관 선진화 계획에 따라, 오는 2012년까지 정원의 11%인 2420명을 감축해야 한다. 이 때문에 한전은 지난해 단 한 명의 신입사원도 채용하지 못했다. 그런데 최근 임금피크제를 전제로 정년을 58세에서 60세로 연장하면서 기존 인력을 감축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한전 관계자는 "공공기관 선진화 계획도 있고 신규채용 여력을 위해서도 구조조정이 불가피하다"며 "퇴직자들에게 퇴직금 외에 명예퇴직금·위로금 등을 추가로 지급한다"고 말했다.

기획재정부에 따르면 2008년 이후 252개 공공기관이 대졸 초임을 낮췄다. 또 129개 기관이 2만2000명을 줄였다. 반면 민영화나 자산 매각 등은 지지부진한 상태다. 정부는 지역난방공사와 인천종합에너지 등 24개 기관을 민영화할 계획이다. 이 가운데 안산도시개발 등 2개 기관을 매각하고 그랜드코리아레저 등 2개 기관을 상장한 것 이외에는 아직 가시적 성과가 나오지 않고 있다. 기획재정부 관계자는 "경기가 좋아지면 민영화 작업에 속도가 붙을 것"이라고 말했다.

◆기존 직원 감축 대신 신입채용 줄이기도

공기업 중에선 인원·임금 감축 목표를 맞추기 위해 신규채용을 미루거나 신입직원들의 임금을 깎는 곳이 많다. '군살'을 빼는 게 아니라 '새살'이 돋는 것을 막는 것이다.

대부분 금융 공기업들은 신입직원 임금을 예년보다 20% 깎아 전반적인 임금수준을 낮췄다. 기존 직원들의 임금을 삭감하는 것은 노사 합의 사항이어서 노동조합의 동의를 얻는 게 어렵기 때문에 신입직원들만 '봉'이 된 셈이다.

이에 따라 작년 하반기 국책은행들의 신입직원 초임연봉은 평균 2850만원대로 집계됐다. 전년 3600만원보다 21% 삭감된 수준이었다. 예금보험공사는 3991만원에서 2995만원으로 24.9%가 삭감됐고, 한국거래소는 3844만원에서 2922만원으로 24%, 한국수출보험공사는 3940만원에서 2970만원으로 24.6%가 줄었다.

하지만 금융 공기업 기존 직원들에 대한 임금조정은 노조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히면서 진통을 겪은 끝에 5% 삭감하는 선에서 마무리됐다.

인력 구조조정 부문에서도 신규채용 대신 기존 직원들을 보호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신용보증기금은 올해 신규 채용을 안 할 것으로 알려졌다. 금융감독원·예금보험공사는 작년과 비슷한 규모를 뽑는데 그칠 전망이다. 산업은행·수출입은행·한국주택금융공사 등은 올해 채용 계획을 아직 정하지도 못했다.

강호인 기획재정부 공공정책국장은 "공기업 선진화가 아직은 신입사원 연봉삭감 등 손쉬운 부분에만 미치는 경향이 있다"며 "앞으로 4~5년은 지속적으로 추진해야 어느 정도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