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회 LG배 세계기왕전] 경적필패(輕敵必敗)

〈총보〉(1~166)=종국 상황에서 참고도를 보자. 흑 1을 선수하고 3으로 단수쳐 아직 해볼 만한 바둑일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백4의 묘수로 귀의 흑이 패(覇)조차 못 내보고 사로잡히는 것. 5가 불가피할 때 6 다음 A와 B를 맞본다. 구리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돌을 거둘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바둑의 승패란 재능이나 수읽기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님을 새삼 일깨운 한 판이었다. 초반은 탁월한 포석감각, 호방한 운석(運石)으로 무장한 구리의 페이스. 퍄오는 거듭되는 역경 속에서도 참을성 있게 추격하더니 기어이 역전승을 이끌어냈다. 100수째부터 초(秒)에 몰렸지만 그의 착점은 갈수록 치밀하고 정확했다.

반면 구리는 집중력이 실종되며 갈팡질팡한 끝에 부끄러운 패배를 당했다. 경적심(輕敵心)이 유죄였다. 상대보다 1시간 이상 덜 쓰고도 완패했으니 무슨 변명을 하랴. 소비시간 총량제의 바뀐 계산법으로도 달랑 2시간 남짓만을 썼을 뿐이다. 상대가 온몸으로 경적필패(輕敵必敗)의 교훈을 실증해준 덕분에 퍄오는 4강으로 날았다. 승부세계에선 역시 적의 '협조'만큼 확실한 무기란 없는 것일까. (59 73…9, 62 76…48, 69…10, 122…116, 124…119, 166수 끝 백 불계승, 소비시간 백 3시간 18분 15초, 흑 2시간 0분 49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