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분석] 덩치 1등, 실적 5등 초라한 '리딩 뱅크'

'덩치는 1등인데 실적은 5등.'

국내 최대 금융회사인 KB금융지주가 받아든 2009년 성적표는 이렇게 요약된다. KB금융지주는 지난해 총 5398억원의 순익을 올렸다고 10일 발표했다. 2008년(1조4886억원)의 3분의 1이 약간 넘고, 2007년(2조7453억원)과 비교하면 5분의 1도 안되는 수준이다. 같은 날 실적을 발표한 우리금융의 성적표는 이와 정반대이다. 순익이 2008년 4540억원에서 지난해 1조260억원으로 두 배 이상 늘면서 금융권 순위가 2008년 4위에서 2009년 2위로 껑충 뛰어올랐다.

KB금융의 실적은 자산 규모가 더 작은 신한금융(순익 1조3000억원)은 물론, 자산이 KB금융의 3분의 1 수준인 외환은행(8917억원)보다 뒤처졌다. 국책은행인 기업은행(7000억원 예상)에도 미치지 못한 탓에 2008년 2위에서 2009년 5위로 떨어졌다.

국내 최대 금융회사이자 '리딩뱅크'를 자부해온 KB금융이 실망스런 실적을 낸 가장 큰 이유는 지난해 금리 하락과 대출 연체율 상승으로 은행의 이자 수익이 격감했기 때문이다. 이 밖에 사외이사가 장악한 불안한 지배구조, 지나친 규모확대 경영, 리스크 관리 실패도 중요한 구조적 원인으로 꼽힌다.

◆이자 수익은 줄고 부실은 늘고

KB금융 전체 자산의 85%를 차지하는 국민은행은 지난해 6358억원의 순익을 내는데 그쳤다. 지난 2008년(1조5108억원)의 절반도 안된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금리가 급락하면서 대출 이자 마진이 크게 줄어든 탓이 가장 컸다. 국민은행의 지난해 이자 수익은 6221억원으로, 2008년(7230억원)보다 14%나 감소했다.

국민은행 관계자는 "주택담보대출의 경우, (대출금리 기준인) CD(양도성예금증서)금리가 2008년 연 5~6%대에서 2009년 연 2%대로 뚝 떨어지면서 대출금리가 조달금리보다 낮아지는 역(逆)마진(손실)이 발생했다"고 말했다. 이후 대출금리를 인상했지만, 경기침체로 대출 자체가 줄어들면서 전체 수익은 계속 감소했다.

수익이 줄어든 반면, 부실 위험이 있는 대출(요주의 대출)은 36%나 늘어났다. 또 연체율이 높아지면서 대손충당금(대출손실을 메우기 위해 따로 적립해 놓은 이익금)은 2008년보다 22.7% 늘어난 2439억원에 달했다. 대손충당금이 커지면 수익이 더 줄어든다.

국민은행은 특히 중소기업 대출에서 큰 손실을 본 것으로 알려졌다. KB금융 고위 관계자는 "다른 은행들이 이미 발을 빼기 시작한 2007년 이후 중기 대출 시장에 뒤늦게 뛰어든 것이 패착"이라며 "지난해 한때 중소기업 연체율이 전체대출의 3% 이상으로 치솟자 이를 1% 수준 이하로 끌어내리기 위해 막대한 자금을 메워 넣어야 했다"고 말했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의 유동성 악화 사태는 국민은행의 실적에 결정타를 날렸다. 국민은행의 금호그룹에 대한 대출은 지난해 말 약 2조원으로, 산업은행·우리은행·농협 다음으로 많다. 2008년 이후 신한은행 등 경쟁 금융회사가 금호그룹에 대한 대출을 줄여나갈 때 국민은행은 반대로 금호그룹에 대한 대출을 늘렸다. 금호그룹 대출은 한때 3조원에 이르렀다.

KB금융 관계자는 "금호그룹 여신에 대한 대손충당금 때문에 지난해 4분기에는 겨우 178억원의 수익을 내는데 그쳤다"면서 "카드 부문에서 수백억원의 흑자가 난 것을 제외하면 은행 경영에서는 사실상 적자를 낸 것"이라고 말했다.

◆지배구조·규모경쟁이 부진 원인

금융계에선 국민은행이 2006년 이후 은행권의 규모 경쟁에 휘말려 뒤늦게 덩치를 불려온 것이 화근이 됐다는 분석이 많다.

B시중은행 고위 관계자는 "2006년 이전의 국민은행은 내실 경영에 중점을 두고 착실한 성장을 거듭해 국내 리딩뱅크로서 중심을 잡는 모습을 보였지만, 2006년 이후 우리은행과의 규모 경쟁이 격화되면서 경쟁력이 없는 분야(기업 금융)에 조급하게 나선 것이 문제가 됐다"고 말했다. 당시 우리은행장이 '우리은행을 1등 은행으로 만들겠다'며 공격적인 자산 확대에 나서자 국민은행도 중소기업과 대기업 대출을 덩달아 늘려 온 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기업 금융에 대한 노하우가 부족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덜 우량한 기업에도 대출이 나갔다. 그리고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경기가 악화되자 이 대출이 급격하게 부실화되면서 이자 수익 감소와 연체율 상승으로 이어져 순익을 크게 깎아먹었다.

지배구조도 문제였다. 뚜렷한 대주주가 없다 보니 전문성이 떨어지는 일부 사외이사들이 득세하면서 덩치 불리기에 제동을 걸기는커녕, 이를 독려했다는 지적이다. 국민은행 전직 부행장은 "당시 이사회에서 일부 사외이사들이 경쟁 은행장의 실명을 거론하며 '1등 은행 자리를 지키기 위해 자산을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면서 "당시 강정원 행장이 이러한 요구를 제대로 견제하지 못했고, 결국 '내실 경영'의 원칙이 무너진 것이 아쉽다"고 말했다.

지난해 실적이 은행권 5위로 밀려나면서 KB금융은 한국 금융의 '리딩 뱅크' 자리마저 위협받고 있다. KB금융은 규모만 보면 총 316조원 자산을 보유해 여전히 국내 최대 금융회사이다. 하지만 회사가치를 나타내는 주식시장의 시가 총액은 신한금융에 1조원 가까이 추월당한 상태다.

한 외국계 투자은행 기업인수합병(M&A) 담당 임원은 "과거에는 KB금융이 외환은행과 하나금융 등 국내 금융회사의 유력한 인수 주체로 거론됐지만, 최근 KB금융의 주가가 떨어지면서 (KB금융이) 인수합병대상으로도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