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0회 베를린 영화제] 巨匠의 뜨거운 신작, 혹한의 베를린을 녹이다

올해 베를린 영화제 최대의 적(敵)은 폭설과 영하 10도를 넘나드는 추위였다. 경유지인 뮌헨 공항에서 폭설 때문에 하룻밤을 꼬박 새워야 했고, 서울에서 부친 짐은 이튿날까지 베를린에 도착하지 않았다. 이런 사정은 프랑크푸르트를 경유해 온 이재용 감독도 나을 게 없었다. 그러나 올해로 60회를 맞은 베를린의 관록을 혹한과 폭설이 무너뜨릴 수는 없었다. 거장 마틴 스코시지와 로만 폴란스키의 새 영화가 처음 선보였고, 만든 지 80년 넘은 독일의 SF 고전이 복원돼 상영됐다.

스코시지 감독은 리어나도 디캐프리오, 벤 킹슬리, 미셸 윌리엄스와 나란히 레드 카펫을 밟았다. 그의 새 영화 '셔터 아일랜드'는 혹독한 추위 속에서도 일찌감치 매진됐으며 대단한 호평을 얻었다. 그는 배우들과 함께한 기자회견에서 "누아르와 심리 스릴러, 심지어 독일 표현주의까지 모두 연출에 녹이려 했다"고 말했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신작 '고스트 라이터'는 피어스 브로스넌, 이완 맥그리거 같은 화려한 출연진으로 눈길을 끌었다. 이완 맥그리거는 감독이 1970년대 저지른 섹스 스캔들(미성년자 강간)에 따른 연금(軟禁) 때문에 영화제에 참석 못한 것을 두고 "이 상황이 서글플 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경쟁작 중에선 '고스트 라이터'를 제외하고는 아쉽다는 평이 대부분인 것 같다. 코언 형제의 '블러드 심플'을 무협영화 스타일로 리메이크한 장이머우 감독의 '여자, 총 그리고 국수집'은 감독의 유머감각을 확인할 수 있으나 연출이 낯익다. "미국 거장에 대한 아시아 거장의 흥미로운 재해석"이라는 평이 나온 수준이다. 베를린에서는 종종 날씨에 빗대어 영화 품평이 나오는데, 작년에는 흐린 날씨 때문에 "경쟁작들이 흐리멍덩하다"는 기사가 나왔었다. 올해는 "폭설처럼 엉망진창"이라는 표현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이재용 감독의 '여배우들'은 베를린 중심가 영화관인 시네맥스 7관에서 상영됐지만 관객들은 이 영화의 맥락을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이를테면 고현정과 최지우가 선·후배를 따지며 다투는 장면에선 한국 같은 반응이 없었다. 이 감독 역시 그런 점을 의식한 듯, 관객과의 대화에서 "이 작품은 출연배우들에 익숙한 한국 관객을 대상으로 만들었다"고 강조했다.

'키친'이 상영된 컬리너리 시네마는 영화와 요리를 동시에 다뤄 흥미로웠다. 먼저 요리 시연이 열리고 나서 그와 관련된 영화를 상영하는 식이다. '포럼' 부문에는 '나는 곤경에 처했다!'와 '너와 나의 21세기'가, '포럼 익스팬디드' 섹션에는 양영희 감독의 다큐멘터리가 상영됐다. '포럼' 부문은 베를린의 주요 프로그램이자 매년 한국 영화를 초청하는 섹션이다.

올해 베를린에는 루마니아나 동유럽 국가의 영화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과거 정치사를 다룬 영화들이어서 유럽 관객의 관심과 호응도 높다. 이와 맥락은 조금 다르지만 프리츠 랑 감독의 1927년 작 '메트로폴리스' 복원판이 눈길을 끌었다. 영화제 기간 동안 극장은 물론이고 TV 예술채널에서도 이 영화가 상영됐다. 이 유서 깊은 무성영화엔 이전에는 볼 수 없던 흥미로운 장면들이 많았다. 가령 메트로폴리스 시장과 마리아 로봇을 만든 유대인 과학자가 과거 연적(戀敵)이었다는 설정이나 선과 악의 대결구도는 이 작품이 순수한 SF가 아니라 멜로 드라마와 범죄 장르가 뒤섞인 종합매체임을 증명하고 있다.

지난 11일 개막 이후 주말까지 베를린 시내 극장엔 발 디딜 틈 찾기도 힘들 만큼 영화 열기가 그득했다. 독일 최대 영화펀드 운영자에서 베를린 집행위원장으로 변신한 디히터 코슬릭은 올해도 어김없이 할리우드 스타들을 등장시키며 칸영화제 독주시대를 견뎌내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