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산행코스ㅣ 충청도의 산] 백화산 285m - 충남 태안군 태안읍

 

/ 글·사진 차은량ㅣ1960년 서울 출생. 1998년 <문예한국> 가을호에 ‘치악산에서’로 등단. 2000년 동서커피문학상 수필부문 은상. 2001년 <수필문학> ‘내 오랜 그리움에 대하여’로 재등단. 2008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예창작지원금 수혜. 현재 충북 청원에서 유기농 쌀농사를 짓고 있으며 여행과 산행, 글쓰기, 사진 찍기를 즐긴다.

겨울 산의 중독성을 생각하면 움찔 몸이 오그라든다. 창망한 하늘 아래 머릿속이 곤두서는 칼날 같은 추위와 말처럼 달리는 냉엄한 기운에 도리어 몸이 후끈 더워지는 것이 겨울 산이다. 겨울은 추워야 맛이고 겨울의 맛을 제대로 즐기기 위해선 추위 속으로 몸을 던져야 하는 법. 겨울 산과 겨울 바다를 한꺼번에 만나자고 나선 길이다.

태안 시가지를 지나면서 오른편으로 백화산의 자태가 한눈에 보인다. 너른 양팔을 펼쳐 읍내를 싸안은 형상이다. 태안초등학교를 오른쪽으로 끼고 담장을 돌아 마을의 외딴집을 지나면 바로 백화산체육공원이다. 산행이 시작되는 기점이지만 ‘갑오동학혁명군 추모탑’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태안은 충청도에서 가장 먼저 동학이 시작된 기포지로 동학도들이 ‘보국안민(輔國安民), 제폭구민(除暴救民), 광제창생(廣濟蒼生)’의 깃발을 날리며 농민항쟁을 일으킨 곳이다. 특히 백화산은 갑오년 이듬해인 1895년 2월까지 동학도들이 마지막 처절한 저항을 했던 눈물겨운 현장이다. 흔히 동학혁명 하면 전라도부터 떠올리기 십상이지만 전라도 남접(南接)에 못지않게 충청도의 북접(北接) 또한 뜨겁고 장대했다는 것을 ‘갑오동학혁명군 추모탑’이 말해준다. 안온한 기후와 천혜의 환경 속에 위치하고 있으면서도 빈번한 왜구의 침입을 겪어온 태안. 바위산을 경계로 한양을 등지고 있어 더욱 그악한 탐관오리들의 횡포에 시달렸을 순박한 백성들의 고초를 생각하며 약수터를 지나 교장바위에 이른다.

백화산 아래 태안초등학교를 연상해 교장(校長)과 관련 되었을 거란 짐작대로 태안군이 만들어놓은 안내판에는 일제강점기 태안보통학교(현 태안초등학교)에 교장으로 있던 나카오 이타로(中尾猪太郞)라는 교장의 미담이 안내되어 있었다. 백화산을 안내해주던 태안의 향토작가 지요하 선생의 표정이 일순 참담해진다. 교장(校長)바위가 아니라 목 졸라 죽인다는 교살(絞殺)과 때려죽였다는 장살(杖殺)의 교장(絞杖)바위란다. 관군과 일본군들에게 전멸당한 북접 동학도들을 이곳에서 교살하고 참수하여 막대에 목을 꿰었다는 교장바위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설사 그 시대에 조선학생들에게 잠시 호의를 베푼 일인 교장이 있었다한들 이 자리에 안내판까지 만들어 널리 알리는 일은 도무지 사리에 맞지 않는다.

교장바위 아래로 태안초등학교와 읍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선생님 몰래 친구들과 교실을 빠져나와 도시락 까먹기 딱 좋을 장소다. 녀석들이 간 곳을 빤히 알고 있는 선생님이 창문 밖으로 분필을 날리면 이마 한가운데 명중할 수도 있겠다. 그러다 산책 나온 부모님께 들키기도 쉬운 산이다. 징검다리 건너듯 이 바위에서 저 바위로 건너뛰면 신발에 흙도 안 묻힐 바위산이 병풍처럼 마을을 감싸고 있다.

이어 쉰질바위를 조망할 수 있다는 안내판이 나온다. 쉰질바위는 저 만큼 산 중간의 하단부에 있고, 안내판은 교장바위를 지난 등로에 세워져 있다. 옆에 있던 만리포정보화마을 위원장이자 수필가인 이태하씨가 유년의 추억을 떠올린다. 길게 경사진 반질반질한 바위에서 미끄럼을 타느라 바지마다 구멍을 내어 어머니의 걱정을 숱하게 들었던 바위란다. 이 흰 바위를 두고 마고선녀가 풀방구리를 엎지른 흔적이라고도 하고 삼신할미가 물살이 센 우럴목을 건너다 그만 치마와 속옷을 적셔 그것을 널어 말린 자국이라고도 한단다. 쉰질이란 오십 질(약 150m 길이)이라는 뜻으로 우럴목은 원북면 청산리와 팔봉면 호리의 양산 사이에 흐르는 가로림만 끄트머리의 여울목을 말한다. 밀물과 썰물시 바닷물이 흐를 때 웅장하게 우는 소리를 내며 흐르는 좁은 목이라는 뜻이다.

파격의 아름다움을 품은 마애삼존불 

잠시 푸른 솔숲을 지나자 낙조봉이다. 바위의 앞면에는 ‘동경대(同庚臺)’라 음각되어 있고 그 옆면에는 누군지 모를 11인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일찍이 태안의 절경을 찾아 백화산에 올랐던 소객(騷客)들의 흔적이다. 태안 1경인 백화산에서도 그중 으뜸이라는 낙조봉에서의 태을낙조(太乙落照) 감상은 뒷날로 미루고 태을암으로 향한다. 마을 뒷산답게 길은 여러 갈래다. 숲길로도 태을암에 닿을 수 있고 차를 타고 태을암 뒤편을 지나는 도로를 이용해 태을암에 갈 수도 있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석불로 추정되는 ‘마애삼존불’의 보호각 뒤편 처마를 스치며 지나는 도로는 백화산 정상의 북쪽에 있는 공군기지로 향하는 군사도로다.

국보 307호인 마애삼존불은 보호각의 그늘 안에 표정 없이 갇혀 있다. 중앙에 관음보살이 있고 좌우로 석가여래와 약사여래가 배치되어 있다. 중앙에 본존불을 모시고 좌우로 협시보살을 배치하는 일반적인 배치와 다르다. 좌측의 석가여래에 비해 우측의 약사여래가 약간 체구가 작고 중앙의 관음보살의 체구는 상대적으로 작은 데다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있다.

그러한 원근감으로 인해 본존불을 중앙에 배치하는 일반적인 삼존불의 배치를 생각할 때 미적 구도나 그 파격의 아름다움은 오히려 뛰어나다. 다만 오랜 풍상으로 인해 이미 자연의 일부가 되어버린 문화재를 보호한다는 구실로 벽을 세우고 지붕을 씌워 자연채광을 차단해버리는 보호각 시설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안타깝다. 사람의 욕심이 아름다운 자연과 귀중한 문화재를 되레 훼손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제는 인정하고 반성해야 할 때가 아닌가.

마애삼존불 오른쪽으로 얼어붙은 계류에 발을 담근 큰 바위에는 태을동천(太乙同天)이라는 글씨가, 바위에 오르면 바둑판이 새겨져 있다. 그 둘 사이에는 일소계(一笑溪)라 새긴 너럭바위와 같은 글씨를 새긴 석판이 세워져 있다. 이 바위의 상부에는 감모대(感慕臺)라 새겨진 석물이 있는데 탁자와 의자의 형상이다. 절 마당에 어울리지 않는 이 같은 글귀들은 지난날 이 지역을 다스렸던 벼슬아치들이나 소객들이 백화산에 든 기념으로 새긴 것으로 보인다.

태을암에서 정상까지는 지척이다. 산 전체가 바위 산으로 사방 조망이 훌륭하다. 바위마다 수석작품이며 작품마다 제목이 있다. 제목들은 그럴듯하기도 하고 혹은 해석이 모호하기도 하다. 정상 표지석이 있는 알바위 앞으로 또 쌍괴대(雙槐臺)라는 제목을 붙인 바위가 있다. 새겨진 글귀를 본 후에야 고개를 끄덕이는 바위보다 형상만 보고도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바위가 얼마나 더 멋지던가.

산 뒤편 산후리 방향으로는 가로림만이, 서산시 쪽으로는 팔봉산의 자태가, 멀리 남쪽으로는 천수만의 아련한 물빛이 보인다. 일제강점기의 일차 간척공사와 1982년 물막이 공사 이전에는 팔봉면 어송저수지 일대와 태안읍 인평리가 다 바다였단다. 이곳 주민들은 하루는 가로림만으로, 하루는 천수만으로 다니며 갯것들을 잡았단다. 이곳에서 나서 이제 황혼에 접어든 지요하 선생의 눈빛에서 훼손되기 전 아름다운 태안반도의 모습이 은빛 지느러미를 펄떡거리며 살아난다.

정상 표지석 앞으로는 서산의 북주산과 부석면의 도비산에 연락을 취하던 봉수대지(烽燧臺址)가 있는데 ‘봉화대지(烽火臺址)’라고 잘못 표기해 놓았다. 봉화는 밤에 피우는 횃불을 말하는 것이고, 봉수대지는 봉화를 피워 올리는 장소를 말한다. 봉수대지 아래로는 고려 충렬왕(1286년) 때 쌓은 백화산성의 자취가 남아 있다. 적으로부터 국토를 지키자는 목적으로 축조된 석성은 오랜 풍우에 의해 부드러운 곡선과 아름답게 마모된 자연석의 문양이 극히 일부만 남아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아쉬움을 갖게 한다.

봉수대지를 지나면서 유쾌한 암릉지대가 이어진다. 경사가 급하지 않아 로프를 잡지 않아도 고수처럼 바위를 타고 산을 내려갈 수 있다. 긴 바위능선은 수석전시장을 방불케 한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평야지대에 팽팽한 활시위처럼 동서를 가로지른 흰 바위산. 푸른 소나무들과 어우러진 기묘한 바위들 뒤에서 아기 공룡들이 튀어나올 것 같다. 진달래 피는 봄산도 좋겠고 초록의 농담이 선명한 초여름도 이 산은 예쁘겠다. 오후 늦게 올라와 바다를 온통 붉게 물들이는 낙조에 함께 물들어도 좋겠다. 달 밝은 밤 너럭바위에 고요히 앉아 있으면 발밑에 찰랑거리는 파도소리도 들리겠다. 지금 이대로 홀로 아무 바위에나 앉아서 진종일 먼 바다를 바라보며 놀아도 좋겠다.

바위마다 켜켜로 쌓아둔 비밀한 이야기들이 흘러나올 것 같다. 안흥성과 만리포, 신두리사구, 꽃지 등의 절경을 제치고 태안 제 1경으로 꼽힌 데에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던 거다. 산은 작고 낮지만 산이 담고 있는 이야기는 크고 방대하다. 산이 이토록 빼어나기에 시절마다 수난도 많았던 것일까. 원유선 ‘허베이 스프리트(HEBEI SPRIT)’호의 기름유출 사고로 이곳 주민들의 후유증은 2년이 넘게 계속되고 있다. 당시 시민단체 친구들과 기름을 닦으러 갔었던 학암포는 얼마나 회복되었을까. 믿느니 자연의 힘이다.

용상(龍床)바위에 앉아 임금님처럼 놀다가 다시 솔숲을 지나는데 성근 눈발이 날리기 시작한다. 태안군민체육관 지붕의 노란색 구조물이 보이고 도로가 나타난다. 이제 눈 내리는 겨울바다로 달려갈 차례다.

 

산행길잡이

2~3시간이 소요되는 작은 산으로 산 전체를 즐기기 위한 산행과 서해 낙조만을 감상하기 위한 산행을 시간에 맞게 선택할 수 있다. 짧은 산행과 함께 태안반도 아름다운 바다를 하루에 즐기는 멋진 코스다.

태을암에는 2004년 국보(제 307호)로 승격한 마애삼존불이 있고, 정상에는 고려(高麗) 충렬왕(忠烈王)13년 정해년(1287)에 축성된 백화산성의 흔적이 남아 있다. 백화산체육공원에는 1894년 갑오년 동학혁명 당시 희생된 충청도 북접(北接)군을 추모하는 ‘갑오동학혁명군추모탑’이 있고 태안초등학교 오른쪽에 태안향교가 있다.

○ 태안초교~백화산체육공원~교장바위~쉰질바위 조망안내판~낙조봉~태을암~정상~바위능선~태안군민체육관 (3시간 소요, 날머리에서 들머리까지 도로 따라 걸어서 20분 걸린다.)

○ 샘골가든~ 약수터~ 소성바윗길~ 정상~ 태을암~ 낙조봉~ 대림아파트 (2시간 소요)

교통

서울남부터미널에서 태안행 버스가 20분 간격으로 출발한다. 2시간 30분 걸린다.

대전동부터미널에서 태안행 버스가 50분 간격으로 출발한다. 3시간 걸린다. 태안시외버스터미널에서 태안체육관까지는 걸어서 20분 가량 걸린다.

승용차 이용시 서해안고속도로~ 서산IC~ 32번 국도~ 태안여고 로터리~ 12시 방면 603번 지방도~ 태안마애삼존불 방면으로 우회전하여 태을암에 간다.

숙식(지역번호 041)  

원북면 신두리의 태도식당(041-675-5939)이 있다. 깔끔하고 푸짐한 생선회를 착한 가격으로 먹을 수 있다. 이외에도 원북면 반계리의 원이식관 박속밀국낙지탕(672-5052)과 태안읍 남문리의 토담집 간장게장(674-4561)이 맛나다.

숙소로 원북면 신두리의 하늘과 바다사이 리조트(675-2111, http://sky-sea.co.kr)와 만리포마을(http://mallipo.invil.org), 별주부마을(http://byuljubu.com)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