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3·2·1… '카운트 다운' 마지막 0번엔 뭘 그렸을까

미술의 역사에서 색상(色相)은 비물질적 상징으로 해석돼 왔다. 그러나 화가 박미나는 색상을 현존하는 물질 그 자체로 다룬다. 그는 유통되는 안료와 염료의 체계, 즉 물감과 인쇄용 잉크의 변화하는 상품군(群)에 주목한다. 따라서 새로 시판된 물감을 구매하고, 회사별로 동종(同種)의 색상을 비교한 다음, 특정한 조합을 짜 캔버스에 적용한다.

박미나의 아홉 번째 개인전인 〈BCGKMRY〉는 그러한 작업 특성을 온전히 드러낸다. 첫선을 뵌 'BK(블랙) 회화' 연작 6점이 대표적이다. 'BK 회화'는 황(黃)·적(赤)·청(靑)·녹(綠)의 4가지 기본색상을 11가지 크기의 동그라미 자로 캔버스에 실컷 덧칠한 결과다. 시제품으로 제작된 '작품 0번'을 제외한 나머지 다섯 작품은 물감 회사별로 제작됐고, 다양한 크기의 동그라미를 반복하는 순서도 제각각이다. 원색을 혼합했으니 이론상으론 결과가 검정이어야 하지만, 실제로는 야릇한 톤의 암회색이고, 사용한 물감 브랜드에 따라 암회색의 뉘앙스도 제각각이다. 원색 물감의 중첩을 통해 무채색의 평면을 지향했으니, 'BK 회화'는 일종의 모노크롬 추상회화인 셈이다.

하지만 이번 전시의 주역은 '딩뱃(Dingbat) 회화' 신작 15점이다. 딩뱃이란 '인쇄물에 흔히 쓰이는 형상을 쉽게 문자와 조합할 수 있도록 활자 형태로 제작한 물건'으로, 컴퓨터 입력기에서 딩뱃 글꼴을 선택한 채 자판을 두드리면 문자 대신 각종 약호와 그림 문자가 출력된다. 화가는 딩뱃을 기계적으로 중첩시켜 해석이 될 듯 말 듯한 도상을 디자인했고, 그 도안을 옮겨 그린 캔버스에 수집한 물감을 다른 색과 섞지 않고 적용·기록했다.

신작은 제목이 모두 숫자로 시작한다는 점과 적용한 색상 팔레트가 원색적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숫자를 누르면 나오는 딩뱃을 기본으로 도안을 구성했기 때문에 작품을 숫자 순서대로 줄 세워 호명할 수 있다는 점도 묘하다. 그림으로 "5, 4, 3, 2, 1"하며 카운트 다운하는 느낌이다. 하지만 0번은 폭발이 아니라 포기다. 숫자 5로 시작하는 제목의 작품에선 경고장을 날리는 픽토그램이 반복해서 등장하지만, 숫자 0으로 시작하는 한 작품에는 기저귀에 '끝(The End)'이라고 적은 젖먹이 아기가 등장한다. 과묵하기로 유명한 작가는 이런 식으로 마음을 다스리는 것일까? 전시는 서울 국제갤러리에서 4월 4일까지 계속된다. (02) 743-84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