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계 발칵 뒤집은 '무명들의 반란'

예상을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승부의 최고 '미덕'이다. 랭킹 10위권 이내 스타들이 독점해 왔던 바둑계 최고 무대가 중위권 기사들에 의해 잇달아 무너지고 있다. 국내 40위에 랭크된 김기용(24) 五단은 제2회 비씨카드배 월드바둑챔피언십서 파죽지세로 질주 중이고, 63위에 불과한 홍기표(21) 四단은 제53기 국수전에서 이창호와 천하를 다투고 있다.

김기용은 2008년 신인 타이틀 2관왕에 오르며 바둑대상(大賞) 신인상을 차지했던 예비 스타 출신. 그러나 이후 슬럼프에 빠져들면서 지난 해엔 13승12패로 간신히 승률 5할을 넘겼다. 이랬던 김기용이 이번 비씨카드배에선 예선 포함, 6연승을 달리며 '세계 8강'에 진입했다. 올해만 따지면 8승2패의 호조다.

기막힌 비급이라도 구해 읽은 것일까. 김기용은 "비씨카드배 본선 첫 판서 우승 후보 강동윤을 꺾으면서 기세를 탄 것 같다"고 스스로를 분석한다. 그 뒤로 자신감이 붙어 여간해선 질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더라는 것. 그는 18일 베테랑 안조영을 맞아 4강을 다툰다. 그 판을 이겨도 이세돌·박영훈 전 승자와 준결승을 펼쳐야 한다. 첩첩산중이지만 김기용은 "목표는 우승"이라고 당당히 밝히고 있다.

홍기표는 올해 바둑계 최고의 '신데렐라'로 떠올랐다. 2004년 입단 후 내놓을 만한 경력이 거의 없기 때문. 랭킹제 도입 초기였던 2005년 여름엔 무려 122위로 출발했었고, 지난 해에도 20승18패에 머물렀다. 그런 그가 이번 국수전에서 예선 4승, 본선 3승 등 7연승의 놀라운 집중력 속에 결승까지 진격하자 바둑계는 발칵 뒤집혔다. 홍민표(24위·七단)와 혼동하는 네티즌들이 생겨날 정도였다.

지난 6일 국수전 결승 1국서 홍기표는 이창호를 맞아 잘 싸웠지만 한 수 삐끗하면서 석패했다. "모두들 1위만 기억하는 사회잖아요. 여기서 준우승으로 물러나면 너무 아쉬울 것 같아요." 요즘 이창호의 최근 기보를 샅샅이 분석 중이란 그는 자신의 역전 우승 확률을 20~30%로 본다. 첫 판을 패한 불리함을 감안해서 그렇다.

둘 모두 자신의 꼬리표(랭킹)가 현재 실력의 정확한 지표는 아니라고 믿고 있다. 김기용은 "2년 가까이 성적이 너무 나빴으니 처진 게 당연한 일"이라면서도 "20~50위는 거의 비슷하다"는 말로 자신감을 내비쳤다. 홍기표의 "우선 30위권에 들겠다"란 말도 현재 자신의 실력을 그 정도로 평가한 것으로 보인다.

김기용·홍기표로 대표되는 '반란'은 어떻게 가능할까. 청년 기예들의 실력은 실제로 백지장 한 장 차이여서 승부는 당일 컨디션과 기세에 의해 판가름나기 일쑤다. 또 일정 기간 동안 누가 심리적으로 안정돼 있느냐가 결정적 변수로 작용한다. 김기용은 "그간 군 복무 문제로 많이 고심해왔다"면서 "올가을 아시안게임 대표로 뽑혀 금메달을 획득, 병역특례 적용을 받는 것이 최대 당면 목표"라고 고백했다.

홍기표는 "승부를 결정하는 것은 물론 실력이지만 운(運)이 차지하는 몫도 꽤 큰 것 같다"는 이론을 폈다. 컨디션이 좋았는데 잘 안 풀릴 때도 많았고, 이번 국수전에선 처음부터 순항을 계속했는데 이 모든 것을 실력만으로 설명하긴 어렵다는 것.

국내 프로기사 수는 총 241명. 이 중 약 20%인 40명 정도가 30대 미만의 청소년이며 이들이 최상위권을 석권하다시피 하고 있다. 반짝이는 재기(才氣)로 무장한 주니어 기사들은 승부의 압박감 속에서 고뇌하고 발전하며 때론 좌절한다. 김기용·홍기표의 부상(浮上)은 이변 같지만 이변이 아닌 셈이다. 요동치는 순위싸움 속에서 또 어떤 '이단아'가 등장할지, 주목의 대상으로 떠오른 두 기사의 종착역은 어디쯤인지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