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회 LG배 세계기왕전] 공터와 옥토(沃土)

 

 

〈제8보〉(109~122)=고수들 바둑에서 이른바 '한 방'으로 승부가 나는 경우는 드물다. 고도의 흥정과 계산 속에 미묘한 균형이 유지되다가 어느 한순간 저울추가 미세하게 한쪽으로 살짝 기우는 식이다. 그것도 엄청난 악수나 패착을 둬서가 아니라 형세에 대한 바늘 끝만한 오판(誤判)이 범인일 때가 많다.

앞서 흑이 ?Y를 놓을 때만 해도 흑은 좌변과 좌중앙 처리에 만족했다. 형세를 괜찮게 보고 있었다는 뜻. 이 수가 한 칸 오른쪽, 즉 112에만 놓였더라도 이 바둑의 승패는 여전히 안개 속을 헤매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백은 서둘지 않고 우상 쪽을 넘었는데 이게 또한 완벽한 수순이었다. 111까지 선수로 득을 본 뒤 유유히 중앙에 손을 돌린다.

112 붙임이 호착. 118까지, 공터처럼 보이던 하중앙 일대가 완벽한 백의 옥토(沃土)로 편입됐다. '바둑 저울'의 추가 가늘게 떨면서 쿵제 편으로 넘어가는 순간이다. 그렇다면 113으로 114에 붙여 저항하는 수는 없을까. 맛이 나빠 결행할 수 없다는 결론이다. 참고도는 하나의 예. 이창호의 낯빛이 어두워진 반면 쿵제는 한결 가벼운 손길로 122 차단에 나선다. 창졸간의 변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