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기사 '삭발'… '약발'은 받을까

제11회 맥심배 결승전이 시작된 지난주 서귀포시 하야트호텔. 회견장에 모인 보도진의 시선은 빡빡머리로 나타난 강동윤(21)에게 집중됐다. 쏟아지는 질문에 그는 "성적이 나빠 관심 끌려고 머리를 밀었다"고 얼버무렸다. 사회자가 "단단히 마음먹고 나온 모양"이라고 해석하자 상대방인 최철한(25)은 "귀엽다"고 받아 폭소가 터졌다.

바둑계에서의 삭발은 낯설지 않다. 잊을 만하면 또 등장한다. 오직 혼자 힘으로 몇 시간씩 사투를 벌여야 하는 바둑은 외롭고 고통스러운 직업이다. 중요 대국서 패해 의기소침할 때, 심기일전의 계기가 필요할 때, 그들은 삭발을 돌파구 삼아 새 각오를 다지곤 해왔다.

박정상은 2006년 세계 정복 직후 4개월여 동안 뜻밖의 부진에 빠졌다. 투지 실종 탓이라고 판단한 그는 머리를 싹 밀어버렸고, 그 덕분이었는지 곧바로 열린 제8회 맥심배 결승서 자신에게 7연패를 안겨줬던 이세돌을 처음 꺾는 수확을 올렸다. 그러나 모든 기사들이 '삭발효과'를 보는 건 아니다. 강동윤처럼 "삭발 후엔 오히려 성적이 더 내려간다"는 기사들도 없지 않다.

머리칼을 자르면 동료들 사이에서 일약 스타가 된다. "선배들이 모두 다가와 머리를 만진다"(박정상). "두상(頭相)이 너무 예쁘다며 쓰다듬는데 화도 못 낸다"(목진석). 박정상은 "머리를 감을 때와 말릴 때만 좋더라"며 "특히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볼 때마다 매번 후회막급이었다"고 회상했다.

세 번을 단행한 강동윤 목진석 박정상 등의 '상습 삭발족'외에 김지석 이희성 고근태 등이 유경험자로 꼽힌다. 고참급들 중에선 강만우 김동엽 (고)이주룡 등도 머리를 완전히 민 적이 있다. 일본에선 유키(結城聰) 다케미야(武宮正樹) 요다(依田紀基) 등이 '스킨헤드족(?)' 리스트에 올라있다.

삭발은 단체전서 필승을 다지는 '결의용'으로도 자주 애용된다. 1995년 11월 한국기원 일대에선 최정예 주니어 기사들이 대거 삭발한 모습으로 돌아다녔다. 한 주 전 상하이에서 제2회 한·중 신예대항전이 열렸을 때, 양국 선수들이 임전 소감을 밝히는 자리에서 "만약 우리가 지면 전원 머리를 밀겠다"고 김성룡이 호기를 부린 게 화가 됐다. 결과는 한국의 3승9패 참패였다.

"꼭 그렇게 만들어 주겠다"던 창하오(常昊)의 저주(?)가 현실화되자 한국 선수들의 불평이 쏟아졌다. 최명훈은 "상의도 없이 그런 약속을 했다"며 투덜댔고, 막내 이성재는 "깎지 않겠다"며 '저항'했다. 하지만 윤성현 안조영 목진석을 포함한 출전자 6명은 결국 '국제 약속'을 저버릴 수 없었다.

비슷한 사건은 1985년 일본에서도 있었다. 제1회 일·중 슈퍼대항전서 일본은 낙승 예상을 뒤엎고 중국에 끌려가다 총 9명 중 후지사와(藤澤秀行) 고바야시(小林光一) 가토(加藤正夫) 등 3명만 남았다. 중국 원정 출발에 앞서 후지사와는 "지고 돌아올 경우 셋 모두 삭발하겠다"고 배수진을 쳤다. 일본은 녜웨이핑(??衛平)에 막혀 끝내 패배, 귀국 후 3명 모두 '이발소의 이슬'이 됐다.

하지만 김성룡(35) 九단은 앞으로 기사들의 삭발이 점차 감소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요즘 젊은 프로들에게 삭발은 비장한 결의를 다지려는 뜻보다 일종의 '패션'이 돼가고 있다"면서 "선택 확률도 낮아질 것"이라고 분석했다. 김 九단은 연구생 시절의 5~6번을 포함해 총 10여 회나 머리를 박박 밀었던 '삭발 전문가'. 그의 진단이 맞는다면 험난한 승부세계에서 '심기일전파'들이 앞으로 들고나올 '대안'은 무엇일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