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혜전 펀드팀장의 '재테크 파일'] 기업 신용등급 버블 심각… 못믿을 신용평가사

올 들어 채권형 펀드에 4조5000억원의 시중 자금이 유입되는 등 채권 시장이 호황세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신평사들이 내놓는 신용등급에 대한 신뢰성이 떨어지면서 신용등급별 회사채 기준 금리 또한 왜곡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물론 국내 신용평가사들은 대개는 객관적 기준으로 공평하게 신용등급을 부여하고 있다. 하지만 이처럼 일부 기업들에 매겨지는 신용등급에 버블이 끼어 있다면 투자자들이 기업 가치를 평가할때 오판을 해 피해를 볼 수 있다.

미국에서도 글로벌 금융위기 때 일부 글로벌 신용평가사가 매긴 기업 신용등급이 엉터리였다는 점이 드러나 도덕적 해이 비판을 받은 바 있다.

◆사상 최고 수준의 신용등급 상향조정비율

지난달 25일 오후 4시 여의도 NH투자증권 9층 강의실에 채권펀드매니저와 애널리스트들 1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한국신용평가 주최로 H그룹 신용등급 관련 세미나가 열렸다.

당시 참석자 중 한명은 "재작년과 작년 실적이 나빠졌는데 등급 낮출 기회를 놓쳤던 것 아니냐"고 항의했다. 이 그룹의 주요 계열사는 2008~09년 부채비율이 450%대 이상까지 급증하고 적자를 기록했지만, 신용등급은 2008년 이후 A등급을 계속 유지해왔다. 세미나가 끝난 뒤 채권시장 관계자들은 "작년 항공업종이 어려울 때에는 (신용등급을) 내릴 생각도 안 하더니 지금은 너도나도 올릴 생각만 한다"는 불만이 터져 나왔다.

국내 3대 신용평가사가 올 들어 3월 말까지 신용등급을 상향 조정한 기업 수를 살펴보면, 한기평(한국기업평가) 24개, 한신정평가 17개, 한신평(한국신용평가) 16개다. 반면 하향 조정한 기업 수는 한기평 6개, 한신평 2개, 한신정평가 3개로 적다. 신용평가사들의 상향 조정 기업 수를 하향조정·부도 기업 수로 나눈 등급상향비율(up-down ratio)은 한신평이 8%로 경기가 호황이었던 2005년(7.2%) 수준을 뛰어넘어 1998년 통계 작성 이후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한신정평가의 비율도 5.7%로 최근 10년간 최고 수준이었고, 한기평(4%) 역시 최고치였다.

익명을 요구한 채권펀드매니저는 "이제 겨우 국내 기업들의 실적이 글로벌위기 이전 수준을 회복했는데 등급을 이전보다 높이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시장금리 왜곡하는 신용등급

신용등급을 내리는 기업은 갈수록 줄어들고 상향 조정된 기업이 누적되다 보니 최고 등급(AAA등급) 바로 밑 단계인 AA등급 기업만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늘고 있다. 한기평이 평가한 기업 중 AA등급 기업의 비중은 2008년 말 17.6%(59개)에서 4월 5일 현재 27%(89개)로 급증했다. 한신평도 2008년 말 17%에서 25%로 늘었다.

이 같은 신용등급 인플레이션 현상에 대해 전문가들은 "신용등급을 높게 받은 기업들이 낮은 채권금리(비싼 채권가격)로 회사채를 발행하도록 하고, 결국 투자자들이 비싼 가격에 채권을 사도록 해 금리 왜곡 현상을 가져온다"고 지적한다. B증권사의 채권애널리스트는 "펀더멘털(기초체력)에 비해 신용등급이 과다하게 부풀려진 C기업의 경우 기관투자가들이 실제 거래할 때에는 시장 기준금리에 1%포인트 이상 금리를 얹어서 거래한다"고 전했다.

C자산운용사 펀드매니저는 "주식처럼 기업정보가 활발하지 않은 채권시장에서 유일한 정보 창구인 신용평가사에서 시장과 동떨어진 평가 결과를 내놓다 보니 기관과 개인투자자들이 제대로 된 정보를 바탕으로 투자할 방법이 없다"며 "채권 소매시장이 제대로 발전을 못하는 주된 이유 중 하나"라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한기평 관계자는 "경기가 좋아진 데다 현대차 등 특정 그룹의 정기 신용등급 평가 과정에서 계열사들이 일제히 신용등급이 오르다 보니 전체적으로 많이 늘어난 것처럼 보이는 것"이라고 해명했다.

◆신평사들, 왜 그러나

신용평가사는 회사채를 발행하는 기업으로부터 신용평가수수료를 받는다. 이 수수료 수익이 신평사 수익의 90% 이상을 차지한다. 따라서 회사채 발행사인 기업의 영향력을 받기 쉬운 구조를 안고 있다. A신평사 연구위원은 "원하는 신용등급을 주지 않으면 다른 경쟁 신용평가사로 옮기겠다는 기업들이 있다"며 "특히 신용등급을 한번 내린 신평사에는 기업들이 다시 평가를 맡기려 하지 않는다"고 토로했다. 신평사 출신의 길기모 신한금융투자 연구원은 "신평사 CEO들도 전문경영인으로서 시장점유율과 실적 압박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했다.

여기에 신용등급을 떨어뜨릴 경우 그 기업이 신용위기에 처할 수 있다는 것도 신평사들에 부담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다른 신평사 연구원은 "원칙적으로는 워크아웃에 들어갈 정도의 기업이라면 선제적으로 등급을 내리는 것이 맞다"면서 "그러나 주채권은행과의 매각 협상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등 파장이 확산되는 데 대한 부담이 있는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김형호 아이투신운용 채권운용본부장은 "신용등급이 채권 매매를 할 때 시장의 가이드라인이 돼 줘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다"며 "신평사의 불신이 심화될 경우 같은 신용등급의 채권을 놓고서도 금리 차이가 벌어진 채 매매가 이뤄져 채권시장에 혼란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