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를 배운다고 쓸 수 있을까… 삶을 가르치고 배울 수 있을까

시를 어떻게 쓸 것인가. 영화를 어떻게 찍을 것인가. 그리고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올해 칸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한 이창동 감독의 새 영화 '시(5월 13일 개봉)'는 시(詩)를 배우는 60대 여인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나 감독 스스로 거울을 보며 묻는 질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질문은 맹렬하게 우선(右旋)해 총신을 탈출한 탄환처럼 날아와 관객 가슴에 커다란 구멍을 내고야 만다. 극장의 암흑은 그 상처를 가리기 좋으니, 시와 문학과 예술에서 멀리 떠나간 그대여, 이 영화를 보고 되돌아오라.

66세인 미자(윤정희)는 중학생 외손자(이다윗)와 한 소도시에 산다. 미자의 딸은 이혼한 뒤 혼자 부산에 산다. 화려한 옷과 장식을 좋아하고 늘 명랑한 미자는 동네 노인(김희라) 간병일을 하면서 문화원의 시 강좌를 듣기 시작한다. 그는 사물을 다르게 보려고 노력하지만 시가 써지지 않아 고민한다. 어느 날 강물에 뛰어들어 자살했던 여중생이 죽기 전 몇 달간 남학생들에게 성폭행당했던 일이 드러난다. 미자는 외손자가 그 남학생 중 하나란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는다.

여울에 부대껴 요란한 소리를 내는 강물 위로 여학생의 시신이 떠내려온다. 물에 엎드려 있는 그 작은 몸을 클로즈업하면서 영화 제목 '시'가 스크린에 뜬다. 영화의 시작은 이렇게 고요한 파격이다.

미자는 시 쓰는 법을 배우지만 시를 쓰지 못한다. "시란 사물을 진짜로 보는 것"이란 말을 듣고 집에 돌아와 싱크대 속 설거지감도 바라보고 냉장고 문짝도 쳐다보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대신 그녀는 작은 수첩과 볼펜을 갖고 다니며 시간 날 때마다 메모를 한다. 강사는 "열심히 관찰하다 보면 시상이 찾아온다"고 하고, 아마추어 시인은 "시상은 찾아오는 게 아니라 찾아다니는 것"이라고 한다. 시는 배우면 쓸 수 있는 것인가. 과연 시를 배우고 가르치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시를 배우기 시작한 직후 미자는 의사로부터 치매 진단을 받는다. 그녀는 '전기'란 말이 생각나지 않아 '에너지'라고 말한다. 뇌 한쪽에서는 명사·동사 순으로 단어들이 빠져나가는데, 다른 쪽에서는 시에 필요한 단어들을 간절히 붙들어야 한다. 그녀는 손자 입에 밥 들어가는 모습을 가장 좋아하지만 코밑이 거뭇거뭇한 손자는 몹쓸 짓을 하고 다녔다. 시 낭송회에서 안도현의 시를 읊은 남자는 '가운뎃다리' 운운하며 음담패설을 쏟고, 낭송회 뒤풀이에 나타난 젊은 시인은 술에 취해 "시는 죽어도 싸!"라고 소리지른다. 갑자기 식당 마당에 나가 서럽게 우는 미자에게 음담패설남은 "누님, 왜 우세요. 시가 안 써져서 우세요?" 하고 묻는다. 미자는 삶이 부조리하다는 것을 너무 늦게 알았고, 꽃을 보고 쓰는 것이 시가 아님을 알아버렸다. 그 참담한 깨달음을 눈물로 흘린 뒤에야 그녀는 시 한 편을 쓰기 시작한다.

이 영화에는 이야기를 강렬하게 만들 만한 고비가 여러 번 등장한다. 그러나 감독은 일부러 자극적인 이야기들을 모두 피해갔다. 영화음악도 전혀 쓰지 않았다. 마치 그런 모든 영화적 장식은 앞으로도 절대 쓰지 않을 것처럼.

팀 버튼을 비롯한 칸영화제 심사위원들은 윤정희라는 배우를 이제야 발견한 것을 스스로 책망할 것이다. 김용택·황병승 시인이 김용탁·황명승이란 이름으로 출연하는데, 다른 감독들의 눈독을 받을 것 같다.

얕은 여울에서 물이 돌들에 부딪혀 자글자글 흘러가며 영화가 끝난다. 시도 영화도 인생도 그렇게 흘러가 끝내 깊고 푸른 호수에 다다른다. 자막이 올라갈 때쯤엔 관객도 한층 사려 깊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시네 업데이트] 칸의 여왕에서 '하녀'로 돌아온 전도연 - 84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