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정식의 시네마 오디세이] 하하하

홍상수의 '숨어있는 1인치'를 보는 재미

　'하하하'(감독 홍상수)는 유쾌하다. 쉴 새 없이 웃음이 쿡쿡 터진다. 표면적으로, 홍상수 영화 중 가장 밝고 환하다. 실제로 화면에서는 푸른 남녘 바다와 맑은 햇살이 자주 빛난다. 비 오는 날조차 우중충하지 않다. 배우들도 그 어느 영화보다 자주 웃는다. 그러나 유쾌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 웃음의 끝자락에는 서늘한 그늘이 서려 있다. 한밤의 짙고 퀴퀴한 어둠이 아니다. 한낮 골목길에 드리워진 나뭇잎 그늘 같은 것이다. 다른 홍상수 영화와 같고 또한 다르다.

영화는 선후배 사이인 두 남자 조문경(김상경)과 방중식(유준상)의 청계산 술자리에서 시작된다. 두 사람은 최근에 통영에 갔다 왔다는 공통점을 발견하고, 그곳에서의 일을 교대로 이야기한다. 에피소드 하나 얘기하고 한 잔, 다른 추억 전해주고 또 한 잔 마신다. 전제 조건이 있다. 좋은 일, 즐거웠던 일만 이야기하는 것이다. 영화에서도 인물들은 좋다, 예쁘다, 사랑한다는 말을 계속 되풀이한다. 자기 최면을 걸기 위한 장치라는 느낌이 들 정도다. 하지만 이건 트릭이다. 즐겁고 좋기만 했던 추억 속에는 삶의 쓸쓸한 이면이 담겨 있다. '그늘의 미학'이랄까.

흥미로운 점은 문경과 중식의 행동 반경과 만나는 사람들이다. 장소는 문경 어머니의 복집, 모텔, 선착장, 카페 등으로 정확히 겹친다.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두 남자는 통영에 머무는 동안 관광 해설가 왕성옥(문소리), 시인 강정호(김강우), 문경의 어머니(윤여정), 외국인회사 직원 노정화(김민선) 등을 계속 만나고 그들과 술을 마신다. 그런데 단 한 번도 중복되지 않는다.

인물간의 관계는 다소 복잡하다. 영화감독 문경은 캐나다로 이민가기 전 8년만에 통영의 어머니를 찾아온다. 통영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가 성옥을 만난다. 종아리가 예쁘다는 점에 호감을 느끼고, 그녀를 쫓아다니기 시작한다. 하지만 성옥은 해병대 출신 시인 정호의 애인이다. 정호에게는 일편단심 순정을 바치는 정화가 있다. 유부남 영화평론가 중식은 스튜어디스 애인 연주(예지원)와 몰래 휴가를 즐기러 왔고, 후배인 정호를 따라 여러 사람을 만난다. 그중에 성옥도 있다. 이렇게 인물들은 얽히고 설켜 있다.

기존의 홍상수 영화와 다른 점은 각 인물의 성격이다.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가볍고 밝고 솔직하다. 성옥 앞에서 정호에게 따귀를 얻어맞으면서도 권투선수 포즈로 폴짝폴짝 뛰면서 "쪼그만게, 덤벼??"를 외치는 문경, 자신을 호텔 커피숍으로 불러냈다고 씩씩거리며 잡초를 뽑아와 내던지는 성옥, 우울증 약을 무슨 영양제처럼 먹으면서 껄껄거리는 중식을 보면서 웃지 않을 관객은 없다.

이 귀여운 인물들이 펼쳐내는 에피소드는 사랑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집약된다. '하하하'는 사랑에 관한 청춘들의 복잡 미묘한 심리와 전개 과정을 다채롭게 그려낸다. 홍상수의 기존 작품과 오버랩되는 지점이다. 물론 정조가 많이 다르다는 점에서는 차별화된다. 웃음이다. 그 웃음에는 어둠의 흔적이나 페이소스가 없다. "어둡고 슬픈 것을 조심해라. 그 속에 제일 나쁜 곳이 있다"는 대사는 영화의 톤을 잘 말해준다. 엄마와 아들의 가족애가 등장하는 것도 새롭다.

하지만 이같은 설정은 겉포장일 뿐이다. 결말은 사실 씁쓸하다. 문경은 파도를 보면서 이민을 포기하고, 성옥과의 사랑도 이뤄지지 않는다. 중식은 연주가 마음을 비우면서 한 시름 덜었지만, 그 사랑은 여전히 찜찜하다. 정화와 성옥의 사랑 역시 바람 속의 먼지처럼 부유할 뿐이다. 통영에서의 여름 한 철, 좋은 일과 즐거운 일만 있었는데 왜 그럴까. 여기에 '하하하'의 묘미가 있다. 감독은 유쾌한 웃음의 갈피 속에 사랑의 비밀과 상처를 하나씩 채워넣었다. 슬프다고 혹은 아프다고 소리치지 않으면서 덧없는 사랑의, 삶의 쓸쓸함을 표현하는 것이다. 긍정적인 의미의 표리부동이다. 콜라주 같은 형식은 인물들의 내면과 조응하면서 효과를 발휘한다.

'하하하'를 통해 홍상수 영화가 더 깊어졌거나 넓어졌다고 할 수는 없다. 그는 여전히 일상 속에서 보통 사람들의 삶과 사랑, 욕망, 질투 등의 미세한 결을 세심하게 잡아낸다. 인물들의 고민과 갈등은 경박할 만큼 얕지도 살을 베일 만큼 깊지도 않다. 하지만 영화의 표정이 바뀌면서 한결 친근해졌다. '하하하'는 홍상수 영화의 숨어있던 1인치가 비로소 햇빛 속으로 걸어나온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김상경 유준상 김강우 문소리 윤여정이 보여준 고른 연기도 인상적이다.

< 기획취재팀ㆍdada@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