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아홉…" 그녀 초읽기에 돌부처도 초긴장

장면#1(2007년 6월 23일 바둑리그)

김주호와 홍민표 간의 접전이 절정에 이르렀다. 마지막 초읽기에 몰려 있는 김주호가 약간 우세한 국면. 그러나 그녀의 추궁은 여전히 저승사자처럼 매섭게 이어지고 있다. "여덟…아홉…." 김주호가 황급히 돌을 집어들었다. 순간 그녀로부터 추상같은 '선고'가 떨어졌다. "…열! 백 시간패 하셨습니다."

장면#2(2010년 2월 22일 맥심배 8강전)

서로 눈도 안 마주칠 만큼 냉랭한 35년 라이벌 조훈현과 서봉수의 일전. 그녀는 서봉수가 착점했다고 생각하고 초읽기를 멈춘 채 한숨 돌리고 있었다. 잠시 후 조훈현의 벽력같은 고함이 그녀를 향해 터졌다. "왜 초를 읽다가 마는 거얏?" 서봉수가 돌을 놓지 않은 채 손을 도로 거둬들였던 모양이었다. 결국 서봉수가 "초읽기 하나 쓴 걸로 처리하라"고 자청, 수습됐다. 마지막 초읽기 상황이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김여원(23)양은 이른바 '계시원(計時員)'이다. 두 대국자와 끝까지 한 세트로 움직이면서 그들의 중요한 '실탄'인 시간을 체크, 관리한다. 국내에 10여명뿐인 지구상 최고 '희귀직종' 중 하나이고, 평균 수명 1년 남짓한 '최고 이직률' 직업이기도 하다. 김여원은 그 세계에서 5년째로 접어드는 최고참급 베테랑이다.

초읽기 카운트아웃 사건은 '차마 열(10)을 못 부른다'는 불문율(?)이 최근 10여년 만에 처음 깨진 대사건이었다. "그날 대국 시작 전 바둑TV 연출자로부터 '(초읽기를) 가차없이 하라'는 특별주문이 있었어요. 그래도 사실 몇 번 봐 드렸던 참이었는데…." 대국이 끝난 뒤 그녀는 '퇴근'을 미루고 한참 동안 대국실에 머물렀다. 김주호과 얼굴 마주칠 자신이 없어서였다.

바둑승부의 초읽기는 시한폭탄 카운트다운 뺨치게 긴박하다. 일곱, 여덟…쯤에 이르면 지켜보는 관객뿐 아니라 계시원들 자신도 숨이 가빠진다. 하지만 거의 모든 수를 아홉에 착점하면서도 눈 하나 깜짝 않는 기사들이 꽤 있다. 김여원은 이를 "자기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려는 승부사 기질"로 이해한다. 그리고 안조영, 강동윤 등을 '최고 경지'로 꼽았다.

길게는 6~7시간 동안 단 한 순간도 긴장을 늦출 수 없다. 바둑 전황(戰?v)에 함께 빠져드는 것도 금물이다. 대국자 중 하나가 말없이 자신을 노려보면 예외 없이 초읽기를 깜빡 놓쳤을 때다. 자유롭게 화장실도 가고 낯도 씻고 오는 대국자들과 달리 그들은 절대 자리를 비우면 안 된다. 김여원은 "대국 종료 즉시 단거리 경주하듯 화장실로 달려간 경험이 수없이 많다"고 했다.

심판 없는 경기다 보니 때론 '판관'역할도 해야 하고, 방송과 연계된 대국이 많아 '조연출' 기능도 벗어날 수 없다. 전천후 역할에 비해 수입은 많지 않아 한 달 150만원 안팎이다. 그래도 지망자가 이어지는 것은 바둑 수련생들에게 대국장은 최고의 '수업 현장'이기 때문. 여자연구생 1조 출신인 김여원은 "대가들의 승부호흡을 현장서 함께 느끼면서 내 실력도 많이 향상됐다"고 했다. 계시원 친구의 '펑크'를 대신 메우며 이 일을 시작했던 그녀는 아직도 프로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친한 기사에겐 천천히 초를 읽는 게 아니냐"는 질문을 가장 많이 받는다. 답변은 물론 "그런 일은 결코 없다"이다. 대국 때 승부사적 포스가 가장 강렬히 느껴지는 기사는 이세돌, 돌을 놓았다 뗐다 하는 법 없이 시원하고 확실하게 착점하는 대표적 기사론 백홍석을 지목했다.

"모든 대국이 기사들의 생업에 직결되는 만큼 우리 계시원들의 책임도 굉장히 무거워요. 단순히 시간만 재는데 그치지 않으려고 틈날 때마다 대국규정집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김여원은 "한국기원이나 바둑TV 등이 계시원들을 위한 교육과정을 만들 때가 됐다고 본다"는 의견을 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