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영옥의 '개봉작 다이어리'] 올라갈 땐 보지 못했던 그 꽃

일등, 정복, 불굴, 경쟁…. 대략 이런 느낌을 주는 단어들이 나는 불편하다. 하긴 '고생 끝에 낙이 아니라, 병 온다'라는 신조를 가지고 있으니, 나란 사람이 이상한 부류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그래서 나는 앞에 열거한 대부분의 단어를 아우를 수밖에 없는 '산악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 건지도 모른다. 게다가 싫어하는 것이 하나 더 있다. 저 산에 왜 오르는가, 라는 아주 오래된 질문.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대답. 산이 바로 저기에 있기 때문에 오른다는 백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을 것 같은 대답….

[블로그] 영화 노스페이스, 처절한 '등반' 스토리

산악 영화를 싫어하는 내가 '노스페이스'를 본 건, 순전 H 때문이었다. '노스페이스'가 고가의 산악용품 브랜드인 줄만 알았지, 영화로 나왔는지 알 리 없는 나는 '유령작가'를 보자고 H에게 말했었다. 소설가가 소설가 나오는 영화를 정말 보고 싶으냐는 뜨악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던 H는 '등정주의' 와 '등로주의'의 의미를 장황하게 설명하더니, 갑자기 목소리가 높아지고, 세계적인 산악계의 문제에 엄청난 고뇌를 가진 사람의 얼굴이 되어선, 얼마 전 이슈가 되었던 오은선 대장의 히말라야 등정에 관한 얘기를 끝도 없이 풀어놓았다. 맙소사. 얼른, 영화를 보는 게 상책이었다.

1936년, 나치가 올림픽을 앞두고 독일인의 '기상'을 알리기 위한 영웅 만들기에 골몰하던 시절에, 수직 높이 1800m의 아이거 북벽에 도전하는 젊은 청년 등반가의 이야기가 '노스페이스'의 골자이다. 줄거리랄 것도 딱히 없어서, 빙벽 위에서 사투를 벌이는 젊은이들의 모습이 영화의 3분의 2를 차지한다. 인상적이었던 건, 이 영화의 관점이다. 정복하기 힘든 알프스의 아이거 북벽을 '올라가는'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내려오는' 이야기였다는 것이다. 잘라 말해,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하는 정상탈환의 인간 드라마는 이 영화에 없다. 대신 포기할 때를 알아야 하는 용기를 보여준다.

나는 늘 누군가의 '성공'보다는 '실패'에 더 관심이 많았다. 성공보단, 실패를 받아들이는 특유 태도가 한 사람의 인생을 좌우한다고 철썩 같이 믿고 있다. 삶을 살다 보면 우리는 언제나 성공보다 실패에 더 많이 노출될 수밖에 없고, 결국 실패를 받아들이는 태도가 그 사람의 삶을 결정지을 것이란 믿음은 적어도 내겐 유효하다. 누굴 예로 들 수 있을까. 에디슨이 전구를 만들기까지 400번의 실패를 했다는 얘기? 21세기 천재의 대명사가 된 스티브 잡스가 아이폰, 아이팟 같은 성공작을 만들기 이전에 만들었던 리사, 애플4, 큐브 같은 수많은 실패작들?

'노스페이스'는 그런 면에서 적절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정복이라는 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실패에 대한 질문을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성공'이 아닌 의미 있는 '실패'가 우리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 말이다. 영화를 보고 오는 길에,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때문에 오히려 구원받은 자신의 삶에 대해 담담히 말하던 여자 주인공의 목소리가 너울거렸다. 문득 불가의 화두 같은 고은의 시가 떠올랐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했던 그 꽃.'


노스페이스

감독: 필립 슈톨츨 개봉: 6월 2일 관객 수: 5115명(6일 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