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영옥의 '개봉작 다이어리'] 이 지독한 시대… 해독제 같은 사랑 이야기

가끔 삶에도 해독제가 필요한 법이다.

그럴 때, 나는 주로 빅토리아 시대의 소설을 읽는다. 사랑에 빠진 주인공은 기어이 사랑을 이루고, 악인은 선인에게 눈물 흘리며 굴복하거나, 시련은 성공을 위한 담금질임에 틀림없는 완벽한 인과응보 세계의 이야기들 말이다. 토막살인, 근친상간 같은 단어가 심심찮게 신문에 등장하는 이 지독한 '하드보일드'시대에는 홍차 맛 타령이나 하며 거실 안락의자에 앉아 '논리정연한 추리' 하나로 범인을 잡는 '미스 마플' 같은 낭만적인 탐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소설이나 영화에마저 나쁜 피가 넘쳐나고 악행들은 진화돼 악랄해지고 뉴스를 보면 현실이 소설가의 상상력을 뛰어넘는단 생각마저 들 지경이니 말이다.

영화 '청설'은 청량한 해독제 같은 영화다. 비누로 깨끗하게 빨아 5월 햇살 속에 짱짱하게 말려놓은 것 같은 남자 배우와 청포도알처럼 커다란 눈동자를 가진 여자 아이. 박태환을 많이 닮은 남자주인공 '티엔커'는 수영선수 언니를 둔 '양양'을 좋아하고 수영장으로 도시락을 배달한다. 영화는 장애인 올림픽에 도전하는 언니를 위해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하는 양양과 부모님의 도시락 가게 일을 돕고 있는 티엔커의 사랑 이야기다. 지극히 평범한 줄거리를 가진 이 영화가 월드컵으로 온 나라가 떠들썩하던 어느 오전 내게 '해독제'가 되어준 건, 이름도 생소한 '손목터널 증후군' 때문이었다. 더 이상 손을 쓰면 '깁스'를 해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의사 덕분에 나는 며칠째 손을 쓰지 못했다.

이 영화 속 주인공들은 줄곧 손으로 대화한다. 수화로 말이다. 덕분에 '창설'에는 수많은 손짓들이 존재한다. 축구선수 '메시'나 '비야' 같은 기념비적인 '발'들이 창궐하는 월드컵 시기에 나는 손가락까지 내려오는 두툼한 손목 보호대를 차고 '손'이 등장하는 영화 한 편에 내내 웃었다. 여자친구에게 어떻게 사과해야할지 몰라 고민하던 티엔커가 "에라이~ 모르겠다. 미안해라고 하지 뭐"라고 말하다가 메일에 "미안해미안해미안해미안해미안해미안해미안해미안해……"를 하염없이 치고 있을 때 저런 사과편지를 받은 게 언제였던가 과연 있기는 했었나 아득해졌다.

문득 김연수의 소설 한 구절이 떠올랐다. "왜 우리는 사랑을 '맺거나' 사랑을 '이루지' 않고 사랑에 '빠지는' 것일까? 그건 사랑이란 두 사람이 채워 넣을 수 있는 가장 깊은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6월은 내게 축구의 계절이 아니고, 지나간 풋사랑을 아쉬워하는 녹색의 계절인 것이다.

이어지는 야근으로 졸린 눈을 비비다 '아이스커피' 한 봉지를 종이컵에 담고 자동반사적으로 '차가운 물' 대신 '뜨거운 물' 버튼을 누른 멍~한 당신이라면, 이 영화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더구나 축구에 열광하는 남자친구나 남편 덕에 '발'로 차는 월드컵에 충분히 지친 사람이라면 '손'으로 제대로 청춘을 속삭이는 이 영화를 추천한다. 밤톨을 깎아놓은 것처럼 예쁜 주인공들도 모자라 깜찍한 마지막 반전까지 가지고 있는 귀여운 영화니까 말이다. 부작용이라면 난데없이 '수화'가 배우고 싶어질지도 모른다는 것, 그거 딱 하나다.

청설
감독: 청펀펀/ 개봉: 6월 17일/ 관객 수: 3600명(20일 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