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분석] 현금내면 바보되는 세상 [정정내용 있음]

회사원 조모(45)씨는 얼마 전 경기도 국도를 달리던 중 주변의 다른 주유소보다 휘발유값이 L당 100원 가까이 싼 가격표시가 붙은 주유소를 발견하고 들어갔다. 마침 휘발유가 얼마 남지 않았던 차였다.

하지만 막상 주유구 뚜껑을 열고 가격표를 자세히 보니, 신용카드로 주유할 때만 그 가격이고, 현금으로 내면 L당 80원이나 더 비쌌다. 조씨는 그 주유소가 휘발유값을 할인해주는 '○○카드'를 갖고 있지 않았다.

조씨는 "완전히 바가지를 쓴 느낌이었다"며 "주유소마다 제대로 할인을 받으려면 카드가 10장도 넘게 있어야 할 정도"라고 말했다.

최근 신용카드사와 정유사가 '주유 할인'을 미끼로 고객 확보전을 벌이면서, 신용카드의 주유 할인 금액도 점점 커지고 있다. 한푼이 아쉬운 소비자 입장에서는 반가운 일이지만 카드와 주유소마다 할인율이 제각각이어서 혼란스러운 데다, 현금으로 주유할 때는 오히려 할인 혜택을 받을 수 없어 '현금 소비자'들이 손해를 보는 경우도 생기고 있다.

◆점점 커지는 신용카드 주유 할인

현대카드가 내놓은 '현대카드O'는 전국의 모든 주유소에서 L당 60원까지 주유비를 할인해 준다. 그동안 특정 정유사와 제휴해 할인해 주던 것에서 벗어나 모든 주유소로 범위를 넓혔다.

삼성카드가 지난 3월 출시한 '삼성카앤모아카드' 역시 전 주유소에서 L당 60원 할인이 가능하다. 일부 가맹 주유소에서는 추가로 40원을 할인받을 수 있어, 최대 L당 100원까지 주유비를 아낄 수 있다.

신한카드의 '신한SK에너지 오일링 카드'는 전월(前月) 이용액이 100만원 이상일 경우, 현금처럼 사용할 수 있는 포인트를 L당 120포인트 쌓아준다. 사실상 120원 할인받은 것과 같은 효과다.

신한카드 관계자는 "최근 유가가 많이 오르면서 소비자들이 주유비를 더 많이 할인해 주는 카드를 우선적으로 찾는다"며 "주유 카드를 다른 상품 구매 때도 사용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마케팅이 치열하다"고 말했다.

신용카드사가 주유 할인 폭을 늘렸다고 하지만, 이것이 모든 고객에게 공평하게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신용카드사의 할인액은 정유사별 고시가격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기름값이 비싼 주유소에서는 할인을 더 많이 받고, 싼 주유소에서는 할인을 적게 받는다.

고시가격이 L당 1700원인 경우, L당 60원 할인하는 신용카드로 결제하면 무조건 1640원이 된다. 같은 신용카드를 사용하더라도 L당 1750원인 주유소에서는 61.8원 할인을 받고, 1650원인 경우에는 58.2원만 할인받는 셈이다.

◆헷갈리는 가격… 주유소도 부담

신용카드를 이용할 때 할인 폭이 커지는 것은 우선 소비자에게는 좋은 일이다. 하지만 주유 할인카드의 종류가 너무 많아, 특정 카드를 소지하지 않은 고객은 오히려 '역차별'을 받는 느낌이다.

체육학을 전공하는 김효진(25)씨는 축구·테니스 시합을 하기 위해 차를 운전해 지방을 돌아다니는 경우가 잦다. 김씨는 "같은 정유사가 운영하는 주유소라 하더라도, 점포마다 할인폭이 조금씩 차이가 있다"며 "소비자로서는 어떤 게 정당한 가격인지 헷갈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특히 현금으로 지급할 경우에 할인혜택을 전혀 받을 수 없는 것은 문제라는 지적이다. 한국주유소협회 관계자는 "아직도 현금으로 주유하는 고객 비율이 20% 정도 된다"며 "이 사람들은 현금을 낸다는 이유로 사실상 역차별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주유 할인액은 카드사와 정유사가 일정 비율로 분담한다. 통상 할인액의 80%는 카드사가, 나머지 20%는 정유사가 분담한다. 최근 할인액이 늘면서 정유사가 분담하는 금액도 늘어, 결국 기름값 상승으로 이어진다는 지적도 있다. 한 정유사 관계자는 "주유 할인금액은 마케팅 비용에 포함된다"며 "결국 비용이 상승하는 만큼 기름값에 어느 정도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지나친 할인이 주유소 경영에 부담이 되기도 한다. 부산에서 주유소를 운영하는 장모(43)씨는 "일부 신용카드사의 경우 할인액 중 일부를 주유소가 부담하도록 한다"며 "이 때문에 마진이 줄어들어 주유량을 정상보다 줄이는 탈법을 저지르는 곳도 간혹 있는 것으로 안다"고 했다.

소비자시민모임 석유시장 감시단 김창섭 부단장은 "카드사와 정유사의 마케팅 활동을 이해하지만, 정도가 지나치면 소비자 혼란만 가중시킨다"며 "마케팅 거품을 빼고 기름값을 안정적으로 낮추기 위한 노력이 더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