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명은 없다, 군불에 숨이 턱 막힐뿐…

'이끼(14일 개봉)'에서 '추격자'를 기대하면 실망할 것이다. 이 영화의 세기(細技)는 뾰족하게 튀어나오지 않고 스크린 곳곳에 매복해 있다. 캐릭터들은 격앙하거나 비명을 지르는 대신 2시간40분 동안 뭉근하게 감정을 데운다. 영화가 비등점(沸騰點)에 닿는 순간 우직하게 밀어붙여 오던 강우석의 새 영화는 마침내 끓어 넘치며 밀도 높은 쾌감을 준다.

해국(박해일)은 아버지의 부음을 듣고서야 오랫동안 찾아가지 않던 아버지 집에 간다. 집 몇 채와 비닐하우스뿐인 외딴 마을에서 해국을 맞은 이장(정재영)과 동네 사람들은 해국이 장례 후에도 마을에 머무르겠다고 하자 극구 말린다.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들에게서 이상한 느낌을 받는 해국은 아버지의 죽음에도 비밀이 숨겨져 있음을 확신한다.

영화의 메인 카피인 '이곳 이 사람들 도대체 무엇인가?'는 이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이자 영화 내내 관객의 머리를 떠나지 않는 물음이다. 그리고 이 질문은 영화가 결말에 다다랐을 때 끝내 해소되는 듯하다가 맨 마지막 반전에서 다시 떠오른다.

영화의 도입부는 무척 인상적이다. 시작 후 10여분이 지난 뒤에야 화면에 제목이 뜬다. 이 도입부는 어떻게 이장 천용덕과 마을 지도자 유목형(허준호)이 함께 살게 됐는지 속도감 있게 설명한다. 그러나 이후 영화는 기어를 저속으로 바꾸고 언덕을 오르기 시작한다. 스릴러의 흔한 기법 대신 촘촘하고 정교하게 짜인 연출로 객석을 압박하는 이 영화는 꽤 오랜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나태하거나 방만해지지 않는다. 관객은 아버지의 죽음에 얽힌 비밀을 풀려는 아들과 이를 막으려는 노인 그리고 '이상한 제3자'인 젊은 여자까지 모든 등장인물을 의심하게 된다. 영화가 끝나도 누가 범인이며 왜 그랬는지 명확하지 않다. 등장인물들 간의 수수께끼가 객석으로 튀어나오는 '생각의 3D'를 형성하는 셈이다.

이 영화에 '강우석 영화같지 않다'는 평이 많은 것은 속도감 때문이다. 기존 강우석 감독 영화들이 대로를 평균 시속 60㎞로 달리다가 종종 과속의 재미를 주었다면, 이 영화는 시종 시속 20㎞로 가파른 경사를 주행한다. 유해진이 도맡다시피 한 유머조차 영화를 장악한 불길한 기운에 종종 짓눌린다. 마을 전체를 통째로 건설한 세트와 면밀하게 계산된 미술 역시 기존 강우석 작품과는 현저히 다른 느낌을 준다.

괴팍한 노인을 연기한 정재영은 칭찬받아 마땅하다. 끝끝내 여운을 남기며 사라지는 주인공을 정재영에게 맡긴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그와 대척점에 선 인물을 연기한 허준호도 깊은 인상을 준다(그의 역할은 정말 연기하기 어려울 것 같다). 박해일 유해진 김상호 김준배 유준상 유선까지 나머지 모든 배우들의 연기도 흠 잡기 어렵다. 물론 기립박수는 그 모든 제작진을 지휘한 감독 강우석이 받아 마땅하다.

[시네 업데이트] 묵직하고 오래가는 강우석 스릴러 - 93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