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끼' 박해일 "송곳에 찔리고 나서 감 잡았다"

하얀 도화지같은 얼굴을 가진 배우 박해일은 참으로 다양한 역할을 해왔다. 바람기 다분한 젊은 교사('연애의 목적'), 속을 알 수 없는 살인 용의자('살인의 추억'), 학생운동 투사 출신의 청년 백수('괴물'), 일제시대의 모던 보이('모던 보이') 등등. 수많은 배역이 그에게 주어졌지만, 진짜 박해일은 그 뒤에 항상 숨어 있는 듯한 느낌이다. 이번에는 강우석 감독의 신작 '이끼'에서 젊은 나이에 인생의 갖가지 고난을 겪은 뒤 지독한 오기로 똘똘 뭉친 주인공 유해국 역을 맡았다.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배역이 아닌 자기 얼굴로 돌아온 박해일을 만났다.

연기 아닌 진짜 공포감에 정신 번쩍 쉴땐 다음 작품위해 조용히 재충전

▶송곳에 찔리고 나서 감 잡았다

일단 영화 이야기를 꺼냈다. 많이 알려졌다시피 박해일은 캐스팅 때부터 유해국 역에 딱 맞는다는 평가를 받았다. 만화 원작자 윤태호 작가도 "'질투는 나의 힘' 주인공을 유해국 역에 떠올렸다"(물론 그가 주인공을 맡았다)고 말할 정도였다. 하지만 박해일 본인은 처음 작업하는 강우석 감독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꽤 걸렸다고.

"제가 좀 더디게 불이 붙는 편이에요. 그런데 감독님은 워낙 주도적이고 리더십이 강하셔서 처음에 좀 '버벅'댔어요. 하지만 곧 탄력을 받았죠."

그는 말 그대로 '한 번 찔리고 나서야' 탄력을 받았다. 전석만(김상호 분)에게 배를 송곳으로 찔리는 장면이다.

"감독님이 '네가 좀 더 각오가 돼야 한다'고 하셨는데, 그 장면에서 송곳에 한 번 찔려 보니까 이게 정말 장난이 아니구나 하고 느껴지더라고요. 정말 잔혹한 게, 세게 푹 찌르면 또 모르겠는데 송곳을 천천히 찔러 넣거든요. 푹푹 세게 찌르는 것보다 그게 더 아파 보여요. 실제로 할 때도 이게 대체 언제 더 아파져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어서 더 겁나고.... 하여튼 그 연기를 하고 나서 정신이 확 들었습니다."

박해일은 "송곳에 찔리는 것과, 그 다음에 도망가는데 김상호 선배가 쫓아오는 장면은 정말 너무 무서웠다. 진짜 죽을 위험에 빠진 듯한 공포에 사로잡혔다"고 말했다.

그의 말에서 그 장면들이 단순한 '연기'가 아니라 공포심을 갖고 겪은 경험이라는 느낌이 났다. "살다가 그런 경험을 얼마나 하겠어요. 통로 속으로 진짜 쫓아오는 것 아닌가 하면서 도망치는데, 정말로 무서워 죽겠더라고요."

▶요동치고 나면 침잠한다

영화에서 워낙 천연덕스럽게 다양한 캐릭터로 변신하는 바람에 박해일의 실제 성격은 '이럴 것'이라는 예상이 어렵다. 그는 여성팬들에게 꽤나 인기가 있지만 사생활에 대해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결혼 생활이나 취미 같은 사소한 것들도 대중의 시야에서 벗어나 있다.

박해일은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이 "시간 날 때 뭐 하세요?"라고 털어놓았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그 질문에 답했다. "사실 인상적인 취미 같은 게 없어요. 일상이 별로 다이나믹하지 않은 편이어서 별로 알려드리지 못해 그런 것 같아요"라고 '두루뭉술'한 대답을 내놓았다.

"몸과 마음이 가는 대로 내버려둬요. 지금 같은 시기는 진짜 조용히 가라앉아 있죠. 집에서 쓰레기 분리수거도 하고요. 취미를 말 안 하는 건, 늘 그것만 하는 줄 알까봐서요.(웃음)"

영화에서 그렇게 요동을 쳤던 박해일이지만, "쉬는 기간에는 물 속으로 가라앉듯이 조용히 침잠한다"고 설명했다. "영화를 마치고 나면 조금 나 자신을 돌보는, 다음 작품을 위한 준비 기간이 필요해요. 사적인 영역은 좀 가리고 싶은 생각도 있어요. 그런 부분이 있어야 작품을 하면서 얻은 스트레스를 거기 풀어놓을 수가 있거든요. 내밀한 부분을 많이 보여주면 스크린에서 다른 모습을 풀어내기가 힘들어져요."

하얀 도화지같은 배우 박해일은 '이끼'를 또 지워내고 여백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 그 여백을 또다시 채우고 공개하기 위해, 지우는 과정은 '비공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