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그 사람 그 후 ―종로양복점 3代 사장 이경주

서울 종로구 신문로1가에 새문안교회가 있다. 1887년에 선교사 언더우드가 창립한 이래 안창호, 김규식 같은 민족지도자가 이 교회에서 배출됐다. 그 대문 바로 오른편 근우빌딩 2층에 양복점이 하나 있다.

종로양복점. 새문안교회가 문을 연 지 19년 뒤, 그러니까 1916년에 개업한 94년 된 양복점이다. 첫 사장 이름은 이두용이었고, 두 번째 사장은 이해주, 세 번째인 현재 사장은 이경주(65)다.

할아버지 대(代)에 창업한 양복점을 손자가 이어받아 이제 100년을 준비한다. 이경주를 만난 건 2009년 4월이었다. 대변에 문득 보니 이런 간판이 붙어 있는 것이다. 'since 1916 종로양복점 733-6216'

간판 따라 계단을 오르니 넥타이 맨 신사가 유리문 안쪽에 앉아 있었다. 그가 3대 사장 이경주였다. 사무실 안에는 사방이 맞춤양복으로 가득했고, 작업대 위에는 옷본을 만들 종이와 각종 자들이 어지럽게 쓰러져 있었다.

1년 하고 두 달이 지난 2010년 6월, 다시 만난 양복장이가 말했다. "이제 100년까지 6년 남았다. 그때까지는 꼭 해야지."

◆일본 유학파 이두용(1881~1942)

일본인 양복점에서 심부름하던 이두용은 30대에 일본유학을 다녀와 직접 양복점을 차렸다. 종로양복점은 지금 종로1가 보신각 뒤편에 있었다. 종로양복점은 당시 학생복까지 만들며 큰돈을 벌었다.

함흥과 개성에도 분점을 낼 정도로 문전성시를 이루더니 1940년에는 피맛골에 2층 건물을 짓고 그리로 이전했다. 1층은 매장, 2층은 공장이었다. 한때 100명이 넘는 직원들을 위해 숙직실도 만들었다.

1942년 이두용이 유언했다. "손재주 있는 해주가 이어라." 이두용에겐 9남매가 있었다. 이해주는 차남이다. 큰형이 잠시 가게를 맡았다가 해방 후 보성전문학교를 나와 만주에서 일하던 해주가 돌아와 2대 사장이 되었다.

이경주는 그때 엄마 등에 업혀 귀국한 해방둥이다. 이해주는 안감 상표에 돌기 하나를 덧보탰다. 해방이 되고 나니 중절모와 양복은 옷감이 모자랄 정도로 팔려나갔다. 그리고 6·25가 터졌다.

◆전쟁 속에서도 미싱을 돌리다: 2대 이해주(1913 ~1996)

2대 사장 이해주는 옷감과 미싱을 짊어지고 피란길을 떠났다. 대구 옆 경산에 자리를 잡고 그 옷감과 미싱으로 전쟁 끝날 때까지 양복점을 운영했다. 전쟁이 끝났다.

조국 재건의 시대, 맞춤양복도 시장이 커졌다. 종로통과 소공로 일대는 양복점 거리로 변했다. 이경주는 "피란길 며칠을 제외하고는 하루도 문을 닫아본 적이 없다"고 했다.

이경주가 말했다. "선친께서 늘 말씀하신 것이 정성무식(精誠無息), '정성은 끝이 없다'였다. 내가 아무리 옳아도 손님이 틀렸다고 하면 손님이 옳은 것이니 이를 따라야 한다고 귀에 박히도록 가르쳤다."

이경주는 손님이 불평을 쏟고 돌아간 뒤 손님이 반납한 양복을 찢어버리는 아버지를 기억한다. 초대 부통령 이시영, 국회의원 김두한을 비롯한 무시무시한 사람들이 종로양복점을 드나들었다.

김두한은 맞춘 옷을 입고 다니다가 고아들을 만나면 벗어주곤 했다. 현금 대신에 시계를 계약금으로 맡긴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그래서 어린 경주는 비싼 시계를 바꿔가며 차고 다니는 호사를 누렸다.

대학에서 건축을 전공한 셋째 경주를 아버지는 후계로 찍었다. 1960년대 후반이다. 엄하게 가르치고, 엄하게 배웠다. "그 비싼 옷감에 가위질을 하려니까 손이 덜덜 떨려서" 재단학원에 가서 재단을 다시 배웠다.

"중국집에 가 자장면 먹다가도 손님 왔다며 등 두드리는 아버지 때문에 그냥 일어서야 했다"고 했다. "우리 누이동생 결혼식에도 가지 못했다. 아버지께서 누군가는 가게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동생한테 지금까지 미안하다."

1960년대 말 종로 일대에 지하철 1호선 공사가 시작됐다. 인도는 폭이 1m도 안됐고 먼지는 풀풀 날렸다. 양복점들은 폭삭 망했다. 2대 사장 이해주는 재단사를 해고하고 아들에게 가위를 맡겼다. 아들은 벌벌 떨며 옷감을 잘랐다.

◆자부심 가득한 3대 이경주(1945~)

1980년 2대 사장 이해주가 아들에게 "곳간 열쇠를 넘겨줬다". 아버지 나이 67세, 아들은 35세였다. 이경주가 말했다. "선친은 무서운 분이셨다. 나는 집에서도 같이 살고, 20대 때부터 가게에 같이 나가 30년 동안 함께 있었다. 다 커서도 함부로 얘길 못했다. 그게 지금 큰 득이 됐다. 내가 인내를 닦을 수 있었으니까. 선친께서는 양복에 대해 굉장히 애착이 크셨다. 할아버지 하던 거 물려받았고, 그래서 다음 대(代)로 물려주려고 굉장히 생각을 많이 하셨다."

세상은 적대적으로 변해갔다. 1980년대 후반 기성복이 대거 등장했다. 맞춤에 가봉에 수령까지 세 번을 들러야 하는 맞춤옷은 위축됐다. 할아버지가 세운 피맛골 종로양복점은 점차 규모가 줄어들었다.

그래도 이경주는 가게를 버리지 못했다. 정성무식이라는 정언명령을 지켜야 하고 정성에 덧보탤 기술과 신용을 위해서는 가게를 비울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명색이 만주에서 태어난 사람인데 이날 이때까지 해외는커녕 국내 여행도 가보지 못했다"라고 그가 말했다.

2002년 피맛골이 재개발되면서 종로양복점은 새문안교회 옆으로 이사했다. 보신각 옆 건물은 지금도 남아 있다. 종로1가 건물은 철거되고 그 자리에 르메이에르 빌딩이 솟았다.

◆살아 있는 역사를 꿈꾸며

이경주가 말했다. "한 20년 하니까 내가 최고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아니다. 사람 체형이 똑같은 게 없으니까, 어떻게 최고를 만드나. 그저 손님이 90% 만족하도록 최선을 다해 만드는 거지."

복식사 연구생, 교수들이 이경주를 찾아온다. 그래서 광화문으로 이사 오며 창고의 수십년 된 옷들을 버린 것이 아쉽다. "그만두고 싶은 마음도 있었는데, 80년 90년 된 게 너무 아깝더라. 역사라는 게 현재 있어야 중요한 거지."

이경주가 할아버지 때 사용하던 영수증 꾸러미를 매만졌다. 영수증에는 소화(昭和) 연도가 인쇄돼 있었다. 영수증 위에 놓인 안감 상표에는 커다란 종과 함께 뾰족한 돌기가 세 개 있었다. 3대를 이어온 노포(老鋪)의 징표였다.

그가 말했다. "90년 넘도록 3대째 한다는 거, 행운이라고 볼 수도 있고. 아무나 돈 있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은가. 앞으로도 100년 200년 해야 하는데, 생각이야 그렇지. 나이 자꾸 먹지, 언제까지 내가 할 거도 아니고…."

몇 년 전 큰아들, 둘째 딸에게 넌지시 물어봤다. 아들은 거부. 의상학을 배우던 딸은 OK. 그런데 "남자 몸을 만지는 직업인데 너는 안돼"라고 했다가 후회하고 있는 중이다. "2016년이면 100년인데… 돌기를 네 개, 다섯 개쯤은 더 그려넣고 싶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