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추억하는 '인간 백남준'

"시게코, 우리가 젊었을 때 당신은 내게 최고의 연인이었소. 이제 내가 늙으니 당신은 최고의 어머니, 그리고 부처가 되었구려."

20세기를 대표하는 비디오 아티스트 고(故) 백남준(1932~2006·)이 뇌졸중으로 투병하던 시기에 부인 구보타 시게코(久保田成子·73) 여사에게 남긴 편지의 내용이다. 당시 백남준은 지극정성으로 병수발을 드는 부인에게 "내가 아프니까 시게코가 바빠. 손이 천 개 달린 부처님처럼 바빠"라고 한 후, 종이에 크레파스로 손이 여러 개 달린 사람의 모습을 그리고 그 위에 편지를 썼다.

40여년간 백남준과 함께했던 구보타 시게코 여사의 회고록 '나의 사랑, 백남준'(이순)이 국내에서 출간됐다. 376쪽 분량으로 백남준의 예술세계는 물론, 아내만이 알 수 있는 '인간 백남준'의 면모를 집중조명했다.

1964년 일본에서 당시 유행했던 전위예술 운동인 '플럭서스(Fluxus)' 동료로 만난 두 사람은 연인 사이로 발전한다. 그러나 백남준은 결혼에 무관심했고, 이에 실망한 구보타 여사는 홧김에 자신에게 끈질기게 구애해 온 유대인 작곡가와 결혼한다. 책에는 구보타 여사가 왜 전(前) 남편과 이혼했으며, 어떻게 백남준의 마음을 돌려 1977년 마침내 결혼에 골인하게 되었는지가 세세하게 적혀 있다. 이 밖에 1998년 백악관에서 빌 클린턴 당시 미국 대통령과 악수하기 위해 휠체어에서 일어섰을 때 백남준의 바지가 흘러내리고 벌거벗은 하체가 그대로 노출됐던 사연을 비롯한 흥미로운 일화들도 가득하다.

 

평생 '바람 같은 남자'의 마음을 얻기 위해 지고지순한 사랑을 바쳐왔던 구보타 여사는 말년에야 백남준을 온전히 소유하게 된다. 투병생활이 길어지면서 끊임없이 아내의 손길을 필요로 하게 된 백남준에게 구보타 여사는 이렇게 말했다. "참 이상해요, 남준. 예전에 당신은 내가 혼자서 차지할 수 없는 바람 같은 남자처럼 보였는데, 지금은 남편 정도가 아니라 아예 응석받이 아들인 것만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