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이야기] 세브란스, 이국인(異國人)에 '기적' 선물

29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제중관 2층 병실에서 간호사가 40대 여성 환자의 몸을 옆으로 눕히고 엉덩이에 난 욕창에 연고를 발라줬다. 치료가 끝나자 환자는 간호사에게 "깜사함미다(감사합니다)"라고 했다. 몽골인 라흐자이 툴(47)씨였다.

몽골 북쪽도시 수흐바토르에서 살던 툴씨는 1999년 돈을 벌기 위해 한국에 왔다. 당시 14살, 13살이었던 아들·딸의 학비를 벌기 위해서였다. 그는 8년간 식당에서 일하며 3000여만원을 모아 2006년 몽골로 귀국했다. 그 사이 남편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한국에서 번 돈으로 러시아 유학을 떠난 아들 학비를 대줄 수 있었던 게 다행이었다.

하지만 툴씨는 2008년 이유도 없이 몸 구석구석이 깨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갑자기 몸이 불어 50㎏이었던 몸무게가 140㎏이 됐다. 당뇨와 고혈압 증세까지 나타났다. 중국과 러시아의 병원을 찾아다녔지만 모두 허사였다. 남아 있던 돈은 병원비로 다 써버렸다.

툴씨가 연세대 세브란스병원과 인연을 맺은 건 작년 7월 초였다. 그는 당시 수흐바토르에 세브란스병원 의료봉사단이 왔다는 소문을 듣고 '혹시'하는 심정으로 봉사단을 찾았다. 봉사단장 홍천수(63·내과) 교수는 "툴씨는 쿠싱 증후군(스테로이드 호르몬이 과다 분비되는 병)이 의심됐다"며 "수술하지 않으면 1~2년 안에 죽을 수도 있어 꼭 고쳐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한국에 돌아온 홍 교수는 병원측과 의논한 끝에 툴씨를 데려오기로 했다. 자녀들을 위해 한국에서 힘겹게 돈을 벌었던 툴씨를 돕자는 데 의견이 모인 것이다.

올 1월 한국에 온 툴씨의 병세는 예상보다 나빴다. 툴씨는 뇌하수체에 생긴 종양 때문에 스테로이드가 과다 분비되는 증세가 심했다. 다행히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병원은 툴씨와 함께 온 딸 깐 벌드 아츠마(24)씨를 위해 노원구 석계역 부근에 작은 원룸을 마련해줬다. 치료비 6000여만원도 의료원 교직원들이 모은 성금으로 해결했다. 몽골로 돌아가는 일만 남았다.

그러나 툴씨는 지난달 8일 의식을 잃고 쓰러져 응급실에 실려왔다. 몸이 비대해져 병원 오기를 게을리하던 툴씨가 호르몬 조절약을 제때 먹지 않아 탈이 난 것이다. 인공호흡기를 대고 투석 등 응급조치를 해서 간신히 살아났다. 병원에선 이것도 기적이라고 했다. 29일에는 입원 이후 처음으로 휠체어를 타고 외출할 정도로 상태가 호전됐다.

문제는 돈이었다. 툴씨가 응급실에 실려온 후 쌓인 치료비가 1억원을 훌쩍 넘긴 것이다. 의료선교센터 소장 이민걸(55·피부과) 교수는 "5월까지만 툴씨를 치료하기로 했었다"며 "솔직히 '괜히 데려왔나'하는 인간적인 고민도 했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그러나 "툴씨의 딱한 모습에 차마 등을 돌릴 수 없었다"고 했다. 병원은 툴씨를 위한 모금에 나섰다. 1만~10만원씩 도움의 손길이 이어졌다.

익명의 기부자는 툴씨를 위한 기도회에 500만원을 놓고 가기도 했다. 8000여명의 교직원 가운데 500여명이 모금에 동참해 현재 5200여만원의 성금이 모였다.

병원 관계자는 "당초 1000여만원이면 진료와 수술이 가능할 것으로 생각해 툴씨를 데려왔다가 예상보다 큰 비용이 들게 됐다"며 "하지만 의사로서의 사명감과 책임감 그리고 '돈 없어서 치료 못 받는 일은 없도록 노력하자'는 박창일 연세대 의료원장의 지론을 따라 툴씨를 계속 돕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신혜정(28) 화가도 툴씨 돕기에 나섰다. 신씨는 툴씨의 어려운 사정을 듣고 지난 19일부터 세브란스병원 로비의 아트스페이스에서 그림 20여점을 전시하고 있다. 신씨는 "그림을 판 수익금과 모금함에 모인 돈을 툴씨를 위해 기부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병실에 있는 툴씨와 딸은 의사, 간호사가 오면 연방 "깜사함미다"고 했다. 툴씨는 서투른 한국말로 떠듬떠듬 말하며 눈물을 글썽였다. "한국인도 아닌 먼 나라 사람한테 이렇게 가족처럼 돌봐주고 병까지 고쳐줘서 너무 고맙습니다. 한국 사람들, 평생 못 잊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