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에게서 보호본능 대신 피비린내를 느꼈다

한 맥주 광고에서 원빈이 봉준호 감독에게 "맥주 맛도 모르면서…"라고 말하며 멀겋게 웃는 모습을 봤다. 2일 낮 서울 삼청동 한 카페에서 만난 원빈은 딱 그렇게 웃었다. 때론 웃을 때 주먹으로 입을 가렸다. 도대체 숫기라곤 없어 보이는 이 서른세 살 배우는 영화 '아저씨(4일 개봉)'에서 총칼과 도끼를 휘두르는 냉혹한 응징자로 나온다. 배우란 이상한 직업이다.

그에게 던진 질문들은 대부분 모범답안을 달고 되돌아왔다. "열심히 했다", "많이 배웠다", "노력하는 배우가 되고 싶다"고 했다. 묻는 쪽이 지치는 경우였다. 주어진 시간은 40분 남짓이었고, 원빈은 이날 총 7개 매체와 인터뷰가 잡혀 있었다. 질문자가 배우 노릇을 해야 할 판이었다.

"저는 조용하고 평범한 편이에요. (영화를 찍으면서) 그런 저로부터 탈출한다고 할까요? 영화에는 극적인 순간이 많다 보니까, 경험할 때마다 인생이 즐거워져요." 이것이 가장 독특한 대답이었고 마지막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원빈은 학창시절에도 말수 적고 있는 듯 없는 듯한 사람이었다고 했다. 개구쟁이였다고 할 수는 있지만 골목대장인 적은 없었다. 그는 "배우 생활하는 게 나도 신기하다"고 했다. 친구도 다양하게 사귀지 않고 몇 명을 깊이 사귀는 쪽이다. "제가 너무 조용하다 보니까 활달하고 말도 잘하는 사람과 친해지는 편이에요. 예전에는 신현준 선배님이 저를 많이 챙겨주셨어요. 요즘은 잘 못 만나지만…."

'아저씨'는 그가 최근 1년 새 받아 본 시나리오 20편 남짓 가운데 선택한 것이다. 그는 "태식(주인공)이란 인물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다"고 했다. "액션만 가득했다면 이 영화를 선택하기 어려웠을 것 같아요. 소미(옆집 아이)와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따뜻한 감성이 있어서 좋았어요. 그런 감성적인 사람이 아이가 납치된 뒤에 무섭게 변하는 모습이 흥미로웠어요."

그가 평소 제안받는 배역 대부분이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여린 캐릭터'다. 지금껏 언론에서 그를 수식해 온 말도 '슬픈 얼굴' 같은 것이었다. 그렇지만 검은색 반팔 티셔츠 밖으로 드러난 그의 구릿빛 팔뚝은 따로 보호받을 필요가 없어 보였다. 그는 매일 1시간씩 유산소 운동과 근육 운동을 한다. "그런 캐릭터는 일부러 사양하기도 했어요. 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서요." 이번 영화에서 그는 사망한 것으로 위장된 채 숨어 살아가는 전직 특수요원이며 주특기는 '섬멸'이다. 세 가지 무술을 자유자재로 쓰는 '살인병기'다. '좀 많이 다른 모습'이다.

영화에서 그는 내내 목소리를 낮게 까는데, 예를 들어 "소미를 찾아도, 너희는 죽는다" 같은 대사를 할 때는 꽤 멋지다. 인터뷰에서도 그의 음성 톤은 거의 일정했다. 그는 "평소에 목소리를 높이는 적이 없지만… 높여서 해결되는 게 있나요?"라고 했다.

많은 관객들은 '마더'에서 그의 연기를 선명하게 기억한다. 봉준호 감독은 "원빈이 바보 연기를 하도 잘해서 '너 원래 바보인데 정상인 척해왔지?'하고 농담하곤 했다"고 말했었다. 이 얘기를 꺼내자 원빈이 조신한 며느리처럼 배시시 웃었다. "저에겐 극찬의 말씀이죠. 아무래도 '마더' 이후로 (사람들이) 저의 가능성을 더 열어두고 봐주시는 것 같아요."

원빈은 '아저씨'에서 처음으로 와이어 액션을 했다. 5층 높이에서 그물에 떨어지는 장면이었다. 줄 하나에 의지해 추락하는 연기를 두고 그는 "위험하다면 굉장히 위험할 수 있는 장면"이라고 말했다.

'아저씨'는 납치되는 아이 소미(김새론)가 원빈을 부르는 말이다. 원빈은 아직 평소에 '아저씨'란 호칭을 들어본 적 없는데, 새론이가 촬영 내내 '아저씨'라고 불렀다. 그는 "아저씨 맞죠, 뭐"라며 씩 웃었다.

이 아저씨는 요즘 읽는 책으로 죽음에 임박한 사람들을 인터뷰한 '인생 수업'을 꼽았다. 아직 차기작을 정하지 않았다는 그는 "'태극기 휘날리며'에 2년, '마더'에 1년 걸렸어요. 작품을 고르고 찍고 보여줄 때까지가 길죠. 저는 작품을 많이 하지 않고, 꾸준히 천천히 하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카페를 나오자 다음 인터뷰 차례를 기다리던 타사(他社) 기자가 "원빈은 신인 때부터 말이 없었다"며 "강원도 정선 출신이어서 그렇다"고 말했다. 정선에 한번 가보고 싶어졌다.

●영화 '아저씨'는… 납치된 소녀 찾아나선 옆집 아저씨의 '화끈한 복수극'

'열혈남아(2006)'로 데뷔한 이정범 감독의 두 번째 작품 '아저씨'는 할리우드 스릴러에 익숙한 관객들을 꽤 불러 모을 것이다. 액션 연출과 연기는 매우 세련됐고 배우들의 연기도 두루 좋다. 한국영화에서 아직 어색한 총격전도 이 영화에서는 매끈하다. 한 마디로 화끈한 영화다.

신원조회가 안 될 만큼 비밀스런 인물(원빈)이 전당포를 운영하며 죽은 듯 살다가, 옆집 소녀를 납치한 악당들을 찾아내 복수하는 것이 이 영화의 줄거리다. 마약과 장기 밀매 같은 강력범죄가 영화를 굴리는 주요 소재다.

원빈의 냉혹한 연기도 좋지만 대개 낯선 얼굴인 조연들의 연기가 특히 돋보인다. 마약밀매단 두목이나 강력반 형사로 나오는 신인들은 마치 깡패나 경찰을 하다가 캐스팅된 것처럼 생생하게 연기했다.

주인공이 유치장에서 탈출하는 장면을 과감히 생략한 뒤 CCTV 화면을 재생해 보여주는 아이디어도 좋다. 골프연습장 안전그물에 주인공이 떨어지는 장면도 무척 인상적이다. 경찰이 주인공 신원을 알기 위해 미국 백악관에 가짜 이메일을 보낸다는 설정은 유머러스하면서도 그럴듯하다.

영화는 그러나 필요 이상 잔혹해지면서 흔들린다. 도끼로 정수리를 찍고 칼날을 입속에 집어넣거나, 흉기로 찌른 뒤에 계속 더 깊이 찌르는 식이다. 그때마다 끔찍한 음향이 과도한 볼륨으로 관객을 위협한다. 관객은 그토록 잔인한 복수에 공감할 준비가 안 됐는데, 주인공은 지옥을 보여줄 것처럼 스크린을 피칠갑한다. 극장을 나설 때 소녀와 아저씨의 우정은 오간 데 없고 피비린내만 남는 것은 이 영화의 결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