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 & Mania] "활시위 당기다 보면 '비움의 철학' 알게 되죠"

7월 말 무더위 속, 서울 남산의 활터 '석호정'에서 40대 여성과 외국인 남성이 나란히 서서 활시위를 당기고 있다. "145m나 떨어진 과녁에 명중시키려면 두 발은 호랑이 발톱처럼 땅에 박고, 다리는 기둥처럼 무거워야 한다." 전국궁도대회에서 여덟 번 우승한 국궁(國弓) 마스터 호미숙(48)씨의 말에 영어강사 제시 버그(Jesse Berg·29·미국)씨가 고개를 끄덕인다. 버그씨는 한국인 부인의 권유로 국궁을 시작한 지 1년 된 '초보'지만, 주말마다 석호정을 찾을 정도로 열심이다.

호미숙=제시처럼 꾸준하게 활을 잡는 경우는 드물어요. 대개 2개월만 되면 심신의 한계에 부딪히지요. 과녁을 맞혀보고 싶은데 활 한 번 못 쏘고 자세만 잡게 하거든요. 손가락은 퉁퉁 붓고, 왼팔과 오른 뺨에 피멍이 들죠. 힘들지 않아요?

제시 버그=매일 활줄로 뺨을 맞는 기분입니다. 조선시대에 임금의 뺨을 때릴 수 있는 유일한 것이 활이었다고 들었어요(웃음). 국궁을 그만두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네버. 국궁을 배우면서 한국에 아예 정착해야겠다고 생각할 정도죠. 국궁은 상대에 대한 예절과 자기절제를 배울 수 있는 무예입니다.

호=첫 화살을 쐈을 때를 기억하나요?

버그=네.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죠. 화살이 과녁에 달린 풍선을 맞혔어요. 엄청난 기적이라 '무엇인가가 나의 화살이 거기까지 가도록 허락한 것'이라고밖엔 생각할 수 없었어요.

호=욕심을 버리고, 시키는 대로 제대로 해서 그런 겁니다. 보통 사람들은 과녁 맞히기에 급급하거든요. 저는 눈을 감고 쏠 때 가장 정확하게 맞아요. 주변 사물이 뿌옇게 되고, 수백 청중의 박수도 들리지 않는 상태. 그런 무아지경(無我之境)이 돼야 과녁이 비로소 나의 화살을 받아주는 겁니다.

버그=미국에서 중학교에 다닐 때 3개월간 양궁을 배웠어요. 그런데 그냥 스포츠였어요. 흥미를 못 느꼈죠. 국궁에는 철학이 있어요. 말씀하신 '비움의 철학'이죠. 사대(射臺)에 서서 "활 배웁니다"라며 절을 한 다음, 시위를 당기고 과녁을 맞힌 후에는 '감사하다'며 목례하는 모습이 아주 인상적이었어요.

호=전 여섯 살 때 대전 보문산에서 어른들이 도포 자락을 드리우고 활 쏘는 모습에 반했어요. 중학생 시절엔 양궁부에 들어가 3개월 만에 소년체전까지 나갔지만 부모님 반대로 접었지요. 그리고 한참 뒤, 남편과 함께 국궁을 배우기로 했는데…. 약속 한 달 만에 남편이 세상을 떠났어요. 그 후 몇 년 새벽 4시면 활터에 나가 하루 300발씩 쏘았지요. 마음에서 절망을 비워내고, 아이들에게 '엄마는 바르게 살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버그=정말 대단하세요. 많이 배우겠습니다.

호=제시 같은 외국인 회원이 얼마나 되나요?

버그=여기 석호정에만 열 명 있습니다. 대부분 남산을 산책하다 활터를 발견하고, 거기서 한국의 전통을 만난 거죠. 국궁이 한국의 문화재가 아니라는 건 의외였어요. 380년이나 된 석호정도 없어질 위기에 있다는데, 슬픈 얘깁니다.

호=서울시가 남산을 원래 모습대로 복원하겠다며 석호정을 철거하겠다는 입장입니다. 4년간 운영해온 초등학생 국궁교실도 중단시켰어요. '남산르네상스 사업'의 하나래요. 국궁의 철학은 자연에 대한 존중이에요. 소나무 한 그루, 다람쥐 한 마리 상하게 하지 않는데….

버그=아이들이 국궁 배울 기회를 잃었다니 안타깝네요. 제가 10개월 된 아들이 있는데, 좀 크면 국궁을 배웠으면 좋겠거든요.

호=한국에 오래 머무시면서 아이와 함께 명궁이 되시길 빕니다. 아직 젊으니, 꾸준히 정진하면 가능할 거예요. 아이가 크면 3박4일로 열리는 전국대회에도 출전해 보시고요.

버그=서울 대회에는 나간 적 있어요. 등수에는 못 들었지만, 대회가 끝난 뒤 활 쏘는 분들과 마신 막걸리 맛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국궁 덕에 주량이 좀 늘었어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