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무슬목 사진 터줏대감 한창호씨

파도가 몽돌을 찰싹 때리고 달아났다. 지난달 20일 오전 4시 40분, 전남 여수 무슬목 해변에서 등산복 차림의 남자 둘이 쪼그려 앉아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푸릇한 새벽공기가 햇살과 섞여 수평선 위에 희뿌연 구름을 만들어 냈다.

아직 시야는 캄캄했다. 분주한 건 파도와 해초 갉아먹으러 돌아다니는 갯강구들. 30분쯤 지나니 하늘이 눈 시리게 환해졌다. 두 남자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딱 좋을 때가 동트기 직전 5분인데 오늘은 날도 흐리고 모래가 많이 밀려와 건진 게 별로 없어요." 한창호(60)씨의 말이다.

한씨는 매일 새벽 무슬목에서 1시간 정도 사진을 찍고 일과를 시작한다. 벌써 20년째. 그 곁을 조수처럼 따라다니는 남자는 한씨에게 한 수 배우겠다며 10년 전부터 무슬목을 찾아오는 초등학교 교사 도성만(50)씨다. 이들은 왜 무슬목에 푹 빠진 걸까.

무슬목은 몽돌이 쌓여 생긴 200m쯤 되는 작은 해안이다. 볼 것이라곤 돌밖에 없다. 30년 넘게 여수공고 화학교사로 있었던 한씨는 1980년부터 사진을 찍었다. 공모전에서 상을 여럿 탔고, 학교에 사진반을 만들었으며, 사진작가협회에도 가입했다.

그가 운명의 무슬목을 만난 건 1991년. "별것 없는 해안이지만 셔터 스피드에 따라 몽돌과 바다의 표정이 달라졌지요. 특히 셔터 스피드를 늦추면 파도가 안개처럼 몽돌 사이를 날아다니죠. 파도가 구름 양·두께, 날씨, 카메라 각도·노출에 따라 갖가지 색으로 변합니다. 마법 같았죠."

작은 돌멩이는 매일 다른 사진을 만들어냈다. 한씨는 동이 늦게 트는 겨울이면 출근용 정장에 등산화를 신고 사진을 찍은 다음 허겁지겁 학교로 갔다. 비가 오면 우산을 쓰고 찍었다. 삼각대가 소금기에 부식되고, 렌즈에 바닷물이 튀면 비닐봉지로 감고 찍었다.

2000년, 2001년엔 무슬목 사진으로 서울 충무로에서 두 차례 전시회를 했고, 재작년 여름에는 무슬목 사진만 찍으려고 아예 학교를 그만뒀다. 그 사이 무슬목은 사진 애호가들의 '출사 장소'로 떠올랐다.

카메라 가방을 챙긴 한씨가 말했다. "요즘 물에 잠긴 돌을 찍어보려고 하는데 생각처럼 잘 안 돼요. 매일 새벽 자판기 커피를 뽑아 마시면서 오늘은 어떤 걸 찍어볼까 고민해요. 그때마다 둥글둥글한 돌이 웃고 반기는 것 같아요."

20년간 얻은 철학이라도 있을까? 한씨는 "학교 제자가 기대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더라도 지켜보고 기다리는 걸 나이가 들어 배웠다"며 "몽돌 사진도 이와 비슷하다"고 말했다.

"한 제자가 어느 날 학교에 나오기 싫다고 해요. 열흘을 기다려주니까 말 없이 돌아와요. 착실히 공부하다 대학에 갔지요."

그는 "몽돌 사진도 사람 같다"고 말했다. "환경에 따라 늘 다른 결과를 만들어내요. 보람을 느끼게도 하고, 어떤 땐 체념하게 만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