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이야기] "삶의 희망·빛 다시 찾았어요"

"이젠 투석까지 해야 한대. 오빠랑 이제 헤어지고 싶어."

작년 11월 시각장애인 김영재(30)씨가 같은 장애를 가진 남자 친구 최진호(37)씨에게 이별을 통보했다. 평소와 달리 싸늘한 말투였다. 당뇨 합병증이 온몸에 퍼진 김씨는 데이트를 하다가도 최씨 등에 업혀 응급실에 가기 일쑤였다. 병원에서는 신장 이식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김씨는 남자 친구에게 짐이 되는 게 싫었다. 병원에서 돌아오던 길에 최씨에게 전화를 걸어 헤어지자고 말한 김씨는 한참을 울었다. 김씨는 신장을 이식해야 했지만 가족과도 조직이 맞지 않아 절망했다.

최씨는 억지로 김씨 손을 잡고 병원으로 달려가 자신이 신장을 떼어 줄 수 있는지 조직검사를 받았다. 병원에서는 "최씨와 꼭 맞는다"며 '적합 판정'을 내렸다. 최씨는 김씨에게 "'남'에게 내 신장을 주면 부모님이 뭐라고 하시겠어. 우리 빨리 결혼하자"고 프러포즈를 했다. 둘은 지난 6월 12일 부부가 됐다. 시력을 거의 잃은 두 사람은 첫 데이트부터 팔짱을 끼고 서로를 부축해야 했다. 김씨는 "우리 두 사람은 앞을 볼 수 없지만, 서로에게 빛이 됐다"고 말했다.

지난 2003년 공주대 사범대학 국어교육학과를 졸업한 김씨는 졸업과 동시에 '임용고시'를 통과했다. 수업 들으러 갈 때만 도서관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를 친구들은 '독종'이라고 불렀다. 졸업하던 해 천안 북중학교 국어교사로 부임했다. 교단에 선 지 2년이 되던 어느 날 학생들의 이름표가 가물가물 보이지 않았다. 의사는 13살 때부터 앓았던 소아당뇨가 눈까지 파고들었다고 했다. 더는 수업을 진행할 수가 없어 2005년 사직했다. 김씨는 "내가 가진 모든 세계가 무너졌다고 생각했다"며 "2년 동안 밖에 나가지도 않고 밤마다 울었다"고 했다.

최씨는 85전 79승(67KO) 6패를 기록한, 촉망받던 주니어라이트급 복서였다. 돌주먹을 자랑하던 신예 복서는 1987년 전국소년체전에도 출전해 금메달을 땄다. "한 대 맞으면 네 대를 때리며 달려들었던 시절"이라고 했다. 무서움을 모르던 '독사' 복서는 22살 때 세상의 빛을 잃었다. 왼쪽 눈은 실명(失明), 오른쪽 눈은 형체만 보였다. 병원에서는 '포도 망막염'이라고 했다.

최씨와 김씨 두 사람은 작년 2월 인천시 부평역 광장에서 처음 만났다. 인천시각장애인복지관 동료가 소개했다. 최씨는 김씨의 '지적인 매력'에 빠졌고, 김씨는 최씨의 '듬직함'이 마음에 들었다. 최씨는 "착하고 예쁜 이 여자를 자꾸만 어머니에게 보여주고 싶더라"고 했다. 김씨는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 같은 내게 항상 희망을 이야기한 사람"이라며 남편 최씨의 팔을 꼭 잡았다.

최씨는 경기도 이천의 한 안마원에서 전속 안마사로 일하고 있다. 김씨도 올해부터 서울 서초동 대한안마사협회 부설 수련원에서 안마를 배운다. 부부는 김씨 신장이식 수술이 끝나면 작은 안마원을 운영할 계획이다. 시각장애가 생긴 뒤 주변 사람들과 모든 연락을 끊었다는 김씨는 요즘 친구와 제자들과 다시 소식을 주고받고 있다고 했다.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소설 '상실의 시대'를 좋아한다는 김씨는 "내가 많은 것을 잃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더 넓고 밝은 세상이 보인다"며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부끄럽지 않다"고 했다. 그는 남편 최씨 손을 꼭 잡고 말했다. "무너졌던 내 세계를 다시 만들어준 사람이에요. 이 사람과 함께라면 이식수술도, 그 어떤 일도 자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