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핍박 때문에 도피생활 투옥당하며 연희전문 중퇴 27일 아들이 대신 학사모 "자식 도리 한 것 같아 기뻐"
17일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김용휘씨 집에 92년 만에 연세대 명예 졸업장을 받게 된 독립유공자 김상덕 선생의 후손 3대가 모여 엄지손가락을 추켜올리며 기뻐하고 있다. /김건수 객원기자 kimkahns@chosun.com
지난 17일 오후 경기도고양시 덕양구 김용휘(75)씨 집 거실에 온 가족이 둘러앉아 빛바랜 성적표를 놓고 이야기꽃을 피웠다. 가족들이 소중하게 간직해온 김씨 부친의 92년 전 대학 성적표다. 1918년 만들어진 성적표에는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 문학과생 김상덕'이란 이름이 뚜렷하게 적혀 있었다. 김상덕은 1964년 사망한, 김씨의 아버지다.
김씨가 "그 당시에 영어를 87점 맞았다는 건 대단한 실력이야"라고 말하자, 아들 진배(41)씨가 "역사 과목은 다 100점이네요. 할아버지는 그때부터 역사 선생님을 하시려 했나봐요"라고 맞장구쳤다. "여기 삼각(三角)이라고 써 있는 건 지금의 수학이고 수신(修身)은 윤리와 비슷한 과목이지." 김씨가 부친의 연희전문학교 학적부와 성적표를 내보이며 설명했다.
김씨 가족이 옷장 깊숙이 보관해오던 한 세기 전 성적표에는 부친이 대학 2학년이던 1919년 기록까지만 있을 뿐, '1920년 3학년' 이후는 공란(空欄)으로 남아 있었다. 김씨는 "선친은 생전에 '연전(연희전문), 연전…' 하시면서 중간에 그만둔 대학을 애틋하게 여기셨다"고 했다.
김씨 아버지 고(故) 김상덕 선생은 1894년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났다.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해 문과 2학년을 다니던 1919년 3·1운동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5개월간 복역했다. 1920년에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지령을 받아 강원도 철원에서 대한독립애국단을 조직했다가 붙잡혀 또 4년간 투옥되면서 자연스럽게 학교를 중퇴했다.
김씨는 "선친은 일제의 핍박으로 이사만 30여 차례 다녔고 이름도 '재근'으로 개명해야 했다"고 말했다. 그는 "원래 부농(富農) 집안이라고 들었지만, 정작 나는 대학 등록금은커녕 용돈 한 푼 받을 수 없어 아버지를 원망한 적도 있었다"고 말했다. 아들 진배씨는 "당시 연희전문학교를 온전히 졸업했다면 평탄하게 생을 살 수 있었을 텐데도 할아버지는 그 모두를 포기했다"고 말했다.
1945년 해방 후 중고교 역사 교사로 재직한 김씨 부친은 1963년 독립운동 유공으로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1964년 사망 후에는 민간인으로는 처음으로 당시 서울 동작동 국군묘지(현재의 국립묘지)에 안장돼 애국지사 묘역의 1번을 부여받았다. 손자 김씨는 "한번도 얼굴을 못 뵈었지만 학교 다닐 때부터 독립운동가 할아버지에 대한 발표를 많이 했다"고 말했다.
김씨는 부친의 뜻을 이어받기 위해 2005년부터 광복회에 가입해 활동했고 부친에 대한 자료도 수집했다. 김씨는 한일강제병합00000 100년인 올해 3월 혹시나 하는 생각에 연세대에 100년 전 학적 기록이 있는지 문의해보곤 깜짝 놀랐다. 부친의 학적 기록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또한 졸업을 하지 못했어도 국가와 모교 발전에 기여했다고 판단되면 명예 졸업장도 받을 수 있다는 답변도 들었다.
연세대는 김씨의 신청을 받고 지난달 자체 심의위원회를 열어 김씨 부친에게 명예졸업증서를 수여하기로 결정했다. 연대 교무처 관계자는 "고인의 독립운동과 건국 공로를 인정해 애국 정신을 기리는 의미에서 명예졸업증서를 드리기로 했다"고 밝혔다. 김씨는 "선친의 평생 한을 풀게 된 것 같다"며 "이제야 자식 된 입장에서 뭔가 해드릴 수 있게 돼 감격스럽다"고 말했다.
김씨 가족들은 오는 27일 연세대 대강당에서 열리는 2010년 8월 학위수여식에 참가해 92년 만에 고인의 졸업장을 대신 받게 된다. 1957년 대학 졸업 이후 53년 만에 학사모를 또 쓰게 된 김씨는 요즘 부친의 졸업식 날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