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가 불길 뛰어들며 지켜 온 증서인데…"

"할머니가 두 번이나 불구덩이에 뛰어들어 가져올 만큼 소중하게 간직해온 게 바로 이 증서들입니다."

23일 오전 10시쯤 경북 포항시 남구 해도동 집에서 만난 김강수(52)씨가 품 안에서 증서들을 조심스럽게 꺼내며 말했다. 누렇게 바랜 증서들은 접힌 부분이 금방이라도 끊어질 만큼 삭아있었다.

크기가 각각 다른 '조선우편연금증서', '괘금(掛金·보험료)영수장', '괘금영수증', '보험료영수장' 4장의 원본이었다. 연금보험료를 모두 납부했음을 증명하는 서류인 A4용지 크기의 조선우편연금증서는 '조선총독부 체신국장'이란 굵은 한문글씨와 그 밑에 도장이 큼지막하게 찍혀 있었다. 조선우편연금은 일제 때 조선총독부 체신국이 발행한 연금이다. 손바닥만 한 괘금영수장은 조선우편연금의 보험료 불입액 총액이 183원 37전임을 확인해줬다. 연금 수취인으로 적혀 있는 '이순이·김봉현'은 김씨의 돌아가신 할머니와 아버지 이름이다.

또 보험료 총액이 213원 30전인 손바닥 크기 괘금영수증과 도장 34개가 찍혀 34개월간 모두 18원가량의 연금보험료를 냈음을 증명하는 보험료 영수장은 할머니가 남긴 또 다른 2개의 보험증서다.

김씨는 "할머니는 이 종이들을 자식처럼 아끼셨다"며 조각조각 테이프로 붙여놓은 연금증서를 펼쳐 보였다. 젊어서 남편과 사별(死別)한 할머니는 맏딸 내외가 일본에서 부쳐주는 돈으로 생활을 꾸렸다. 공사장에서 노동 일을 했던 맏딸 내외는 어머니와 남동생(김씨 부친)을 위해 피땀 흘려 번 돈을 떼어 포항 고향집으로 부쳤다.

김씨 할머니는 그 돈을 쓰지 않고 '조선우편연금' 등 3개의 연금에 불입했다. 할머니가 조선우편연금에 1944년까지 납입한 183원 37전은 1952년 2월 21일부터 매년 100원씩 연금을 타게 돼 있었다. 1941년에 가입한 또 다른 보험은 34개월 동안 매달 꼬박 50전씩 내는 것이었다. 김씨 어머니 오성자(78)씨는 "보험료를 내는 매달 28일이 되면 시어머니는 곱게 옷을 차려입고 10리 길도 멀다 않고 우체국으로 가시곤 했다"고 했다.

1945년 광복이 되자 할머니는 우체국을 찾아가 연금을 받을 수 있는지 물었다. 우체국 직원은 "일본 정부한테 받아야 하는 연금"이라며 연금을 줄 수 없다고 했다.

그래도 할머니는 "언젠가는 받겠지"라며 이 증서를 품에 안고 잠이 들었다고 한다. 이씨는 "시어머니는 6·25 때 포탄이 터져 집에 불이 났을 때, 1955년쯤 옆집에서 난 불이 옮겨 붙었을 때 모두 '잠시 있어보라'며 불 속에 뛰어들어가 이걸 챙겨 나왔다"고 말했다.

하지만 연금 수취인 중 한 사람인 김씨 아버지는 1961년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할머니는 "딸이 번 돈을 아끼고 아껴 아들을 위해 악착같이 연금을 부었는데…"라며 가슴을 쳤다. 맏딸 내외도 일본에서 번 돈을 굴리다 사기를 당해 상심이 더 컸다고 한다. 할머니는 생계를 꾸리기 위해 매일 새벽 4시 누룩공장에 일하러 가는 며느리 오씨에게 "연금 받으면 네가 이 고생을 안 해도 된다"고 울부짖기도 했다. 아들이 돌아간 그해 할머니는 "속에 팔뚝만 한 홍두깨가 들어앉은 것 같다"며 앓아누웠다. 할머니는 1965년 6월 한일협정이 맺어진 지 석 달 만에 화병으로 숨을 거뒀다. 정부가 일본과 대일(對日) 청구권(채권)을 정리해버려 개인들이 일본 정부에 돈을 받을 길이 막혀버렸던 것이다.

오씨는 "시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전에 장롱 깊숙이 묻어놓은 증서를 꺼내시더니 소중히 간직하라고 하셨다"면서 "'네가 연금을 받지 못하면 자식들에게 꼭 물려줘라'는 유언을 남기셨다"고 말했다. 혼자 김씨 3남매를 키운 오씨는 아들 김씨가 결혼하던 1988년부터 정부기관에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연금을 받을 수 있는지 알아봤지만, 그때마다 "돌려받을 길이 없다"는 답변만 들었다. 일본 정부는 1965년 한·일 기본조약으로 개인 청구권이 소멸했다며 지금도 연금반환을 거부하고 있다.

오씨는 증서 넉 장을 봉투 속에 고이 넣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일모레면 눈감을 내가 몇 푼 되지도 않는 그 돈으로 팔자를 고치겠는교…. 어머니 제사상에 그 돈 올려놓고 절 한번 할 수 있으면 여한이 없제."

●일제강점기 연금보험 찾을 방법 없나
대만 가입자들은 확정채무의 120배 받아… 우리정부는 민간청구권 법안 마련 '미적'

일제 강점기 연금보험에 가입한 한국인들이 일제 패망 65년이 지난 지금까지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일본은 식민지배 시대에 일본 국내뿐 아니라 한반도, 중국, 대만 주민들에게 우편저금과 간이생명보험 등 연금보험에 가입하라고 요구했다. 태평양전쟁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일본은 1995~2000년 대만인 가입자에게는 확정 채무의 120배를 지급했지만, 한국인의 예금에 대해서는 1965년 한·일 기본조약으로 개인 청구권이 소멸했다며 반환을 거부하고 있다.

정부는 1975년 대일(對日) 민간 청구권 보상을 했지만 채권(債權) 중심으로 이뤄져, 조선우편연금을 포함한 우편저금과 간이생명보험 가입자는 제외됐다.

일제강점하 민간재산권 청구위원회 박숙혜(64) 부회장은 "전국에 4000여 명 정도가 당시 연금보험 증서를 갖고 있는 것으로 안다"며 "국민의 재산을 보호해야 할 정부가 한·일 기본조약을 통해 오히려 국민 재산을 횡령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외교부 관계자는 "미수금이나 공탁금은 한·일 기본조약으로 청산된 것으로 해석된다"며 "일본 정부에 보상을 요구하기는 무리가 있다"고 말했다.

일본으로부터 보상받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고, 결국 우리 정부가 대신 연금 등을 지급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부와 국회는 관련 법안조차 마련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2007년 5월 17대 국회는 '일제강점하 민간재산 청구권 보상에 관한 법률안'을 발의했지만, 실태조사가 우선돼야 한다는 이유로 법안이 폐기됐다. 18대 국회에서는 국회의원 56명이 실태조사를 위해 '일제강점하 민간재산청구권 실태조사법'을 발의했지만 여전히 기획재정위원회 상임위 소위원회에 계류 중이다. 실태조사가 이뤄지지 않아 현재 일제 강점기 연금증서를 갖고 있는 국민이 얼마나 되는지도 파악되지 않고 있다.

나라 예산을 짜는 기획재정부 관계자는 "개개인의 사연은 안타깝지만, 아직 보상받지 않은 다른 예금·보험 가입자들과 형평성 문제가 뒤따르고 거대한 예산이 소요되는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