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남 한부모·祖孫 가정 학생들 제주도 여행 "일출봉 오른 것처럼 열심히 살거예요"

지난 23일 오전 9시 제주 서귀포시 성산읍 해안도로를 따라 빨간 자전거 18대가 꼬리를 물고 달렸다. 자전거 앞으로 숲이 우거진 성산일출봉이 나타났다. 자전거에 탄 아이들 18명이 "와"하고 소리쳤다.

경기도 성남시 '함께 여는 청소년학교(이하 함청)'에 다니는 중학교 2학년들이다. 대부분 한부모·조손(祖孫)가정 아이들로 모두 기초생활수급 대상자 자녀다.

함청은 대기업 장학재단 후원으로 2008년 설립된 방과 후 학교다. 가정 형편이 어려운 성남지역 중학생을 뽑아 보충학습을 해주고 인성 교육도 한다. 함청 오일화(46) 센터장은 "저소득층 아이들이 빗나가기 시작할 때가 바로 중학교 때"라며 "주눅이 들기 쉬운 아이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기 위해 지난해부터 자전거 여행을 하고 있다"고 했다. 올해는 20일부터 4박5일 제주도를 돌았다.

유난히 몸집이 작은 최종우(가명·14)군은 "다음에 꼭 아빠랑 동생이랑 오고 싶다"고 했다. 최군은 이번이 생애 첫 여행이다. 막노동하는 아버지, 열 살 여동생과 23㎡(약 7평) 단칸방에 사는 최군은 지금껏 한 번도 여행을 간 적이 없다. 어머니가 몇년 전 집을 나가고 아버지는 매일 밤 술을 마시고 최군과 동생을 때렸다. 아버지는 "차비 없으니 학교 가지 말고 동생이나 돌보라"며 최군의 등굣길까지 막았다. 지난해 말 아버지가 구치소에 가서 최군이 소년가장이 됐을 때 오 센터장이 최군을 발견하고 함청에 데려왔다. 최군은 "함청에 오면 마음이 편안해진다"며 "올 초 집으로 돌아온 아빠에게 잘 얘기했더니 이제 술도 안 드시고 동생도 안아주신다"며 웃었다.

최군 옆에서 자전거를 타던 조재민(가명·14)군은 동네에서 알아주는 말썽꾸러기였다. 지난 5월에는 오랜만에 집에 들어온 아버지가 때리자 집을 뛰쳐나왔다. 올 들어 두 번째 가출이었다. PC방과 친구 집을 전전하던 조군을 함청 선생님과 친구들이 5일 만에 찾았다. 조군은 "이곳에서 그림도 그리고 축구도 하면 스트레스 받을 시간도 없다"고 했다.

가정 불화나 생활고로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아이들은 이곳에서 친구들을 얻고, 자기 이름을 기억해주는 선생님들을 만났다. 오 센터장은 아이들 사이에서 '엄마'로 불린다. 그는 "아이들이 웃는 걸 보면 그동안 쌓인 피로가 싹 가신다"고 했다.

부모가 이혼한 후 국가 보조금을 받으며 할머니와 함께 사는 이시연(가명·14)양은 "공부는 남들보다 못해도 자전거는 빨리 배우는 것 같다"며 스스로 대견해 했다. 첫날에는 자전거를 탈 줄 몰라 오르막길만 나오면 자전거를 끌고 다녔지만 이제는 기어 변속까지 척척 해낸다.

정오 무렵 해발 182m 성산일출봉 꼭대기에 오른 학생들은 힘차게 "야호"를 외쳤다. 조군은 "일출봉이 높아 보였는데 막상 한 걸음씩 올라보니 금방"이라며 "집에 돌아가면 오늘 등산처럼 공부도 차근차근 해봐야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