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분석] "글로벌 증시 저평가… 거품 빠질만큼 빠졌다"

미국경제의 더블딥(double dip·경기가 일시적으로 회복하다가 다시 침체하는 현상) 우려가 확산되면서 기업실적에 비해 주가가 저평가되는 이른바 '디레이팅(derating)' 현상이 세계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지난해 하반기 이후 중국과 한국 등 신흥국은 물론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들에서도 기업실적은 빠르게 나아졌지만 주가 회복 속도는 그에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기업실적에 비해 주가가 저평가돼 있다는 것은 앞으로 주가가 올라갈 개연성이 크다는 점을 의미한다. 반대로, 이번 글로벌 금융위기를 계기로 글로벌 증시가 고성장 시대를 끝내고 새로운 저평가 시대에 돌입했다는 '뉴노멀(new normal)' 이론도 등장하고 있다. 이 이론이 맞다면 저평가된 주가가 크게 반등할 가능성은 낮아진다. 증시 전문가들 사이에선 저평가된 주가가 기업 실적을 반영해 올라갈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이 지금까지는 우세하다.

◆확산되는 글로벌 저평가 현상

주가 수준을 평가하는 데 가장 기본적으로 활용되는 지표는 주가수익비율(PER)이다. 주가수익비율이 낮을수록 주가는 실제 가치에 비해 저평가돼 있다는 것을 뜻하므로 주가가 앞으로 오를 가능성이 클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반대로 주가수익비율이 높다면 주가가 지나치게 높은 상태라고 해석한다.

현재 세계 주요 증시의 주가수익비율은 2000년대 들어 가장 낮은 수준으로 떨어진 상태다. 8월 현재 미국의 12개월 예상 주가수익비율은 12배로, 2008년 리먼 사태 직후를 제외하고는 가장 낮다. 2000년대 미국 증시는 통상 14~15배의 주가수익비율을 유지했으며 IT 버블이 생겼던 2000년대 초반에는 20~25배까지 치솟기도 했다.

중국 증시의 주가수익비율도 현재 12배에 불과해 2007년 강세장 때 22배가 넘었던 것과 비교하면 절반 수준으로 낮아졌다. 일본 증시의 주가수익비율도 13.8배로 최근 5년 평균(17.9배)을 훨씬 밑돈다. 인도와 브라질 등 일부 국가를 제외하면 대부분 국가의 주가수익비율이 최근 5년 평균치 아래로 떨어졌다.

◆한국 증시도 저평가돼

8월 현재 MSCI가 내놓은 한국의 12개월 예상 주가수익비율은 8.9배로, 최근 5년 평균치보다 15% 정도 낮다. 리먼 사태 직후인 2008년 11월의 8.7배와 비슷한 수준까지 떨어졌다. 이 수치로만 보면 상당히 저평가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전 세계 증시가 동시다발적으로 저평가돼 있기 때문에 굳이 국제자금이 한국 증시에 몰려들 이유가 약해진 상태다.

한국 주식시장은 글로벌 주식시장에 비해 항상 저평가받아왔는데, 그 격차는 평균 27.3% 정도였다. 외국에서는 평균 1만원에 거래될 주식이 한국에서는 7270원에 거래됐다는 뜻이다. 그런데 최근 한국 증시가 외국 증시에 비해 상대적으로 빠르게 상승하면서 한국 증시와 글로벌 증시의 주가수익비율 격차는 23.3%로 오히려 좁혀졌다. 한가람투자자문 박경민 대표는 "주가란 미래가치의 반영인데, 글로벌 경제의 불확실성이 가시지 않은 만큼 주가가 저평가되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라고 말했다. KB투자증권 김성노 연구원은 "글로벌 증시의 저평가 현상이 한국 주식시장의 상승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한국 증시가 저평가돼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앞으로 한국증시가 다른 나라 증시에 비해 더 오름세를 탈 것으로 보기는 힘들다는 얘기다.

◆일시적 현상인가, 장기적 저평가 시대의 시작인가?

이 같은 증시 디레이팅 현상은 언제쯤 해소될 수 있을까. 낙관론자들은 멀지 않은 시기에 주가가 제자리를 찾게 될 것이며, 따라서 지금이 좋은 주식을 싸게 살 수 있는 기회라고 주장한다. 대우증권 김학균 팀장은 "현재 낮은 주가수익비율은 투자심리 위축의 산물이며, 투자심리가 위축됐다는 것은 주식시장에 거품이 없다는 의미"라며 "주식에 대한 투자자들의 신뢰가 회복된다면 올 하반기부터라도 대세상승장이 연출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하지만 미국의 더블딥, 유럽의 재정긴축, 일본의 재정부채, 중국의 경착륙 등 세계 경제의 앞날에 지뢰밭이 도사리고 있는 상황이어서 저평가 증시가 상당 기간 지속될 수 있다는 전망도 있다. 더 나아가 2007년까지 이어진 고성장이 끝나고 저성장 국면에 접어드는 '뉴노멀'시대가 시작된다면 적정 주가의 수준도 이전보다 한단계 낮아질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월드뱅크에 따르면 2004~2007년 세계경제의 실질 GDP성장률은 평균 3.8%에 이르렀지만, 2010~2012년 전망치는 기저(基底)효과를 감안하더라도 3.3~3.5%로 낮아졌다. 또 유럽 재정위기 등이 제대로 해결되지 않으면 세계경제 성장률이 2.9~3.2%로 더 낮아질 수 있다고 월드뱅크는 전망했다.

저성장 시대에 글로벌 증시가 어떤 모습을 보일지는 일본의 사례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고 '뉴노멀'의 신봉자들은 말한다. '미국 추월'을 눈앞에 두고 고속성장을 질주하던 1980년대 일본 증시의 주가수익비율은 40~50배에 달했다. 당시 투자자들과 증시 전문가들은 "일본 경제와 기업의 앞날이 밝은 만큼 주가가 거품이라고 볼 수 없다"며 상승장에 베팅했다. 하지만 '잃어버린 10년'을 거치며 주가수익비율이 13배까지 떨어진 지금도 일본 증시는 여전히 추락을 거듭하고 있다.하지만 이 같은 비관적 시나리오는 아직은 소수론이다.


☞ 주가수익비율(PER·Price Earning Ratio)

주가를 주당순이익(EPS)으로 나눈 수치로 주가가 얼마나 제대로 평가되고 있는지를 가늠하는 지표로 활용된다. 예컨대 어느 기업의 주가가 1만원, 총 발행주식수가 1만주, 순이익이 1000만원이라면 주당순이익은 1000원(1000만원/1만주), 주가수익비율은 10배(1만원/1000원)가 된다. 통상 증시 전문가들은 10~12배 정도를 적정 수준으로 보며, 이 비율이 낮을수록 주가가 저평가된 것으로 해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