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정말 축구할 맛 납니다"

#2001년 11월 25일

FA컵 결승전 종료 휘슬이 울리자 이태호 대전 감독이 울었다. 그의 품엔 결승골을 터뜨린 김은중이 안겨 있었다. 선수 시절 상대에 걷어차여 오른쪽 시력을 잃은 이 감독의 품에 안긴 김은중 역시 왼쪽 눈이 실명 상태였다. "제 눈이 축구를 못 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습니다." 김은중은 '외눈 투혼'의 승부사다.

#2010년 7월 24일

제주와 인천의 리그 경기 추가시간, 김은중이 극적인 역전골을 뽑아냈다. 제주를 리그 선두로 지켜내는 골이었다. 2골 1도움을 올린 김은중은 경기 뒤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축구가 이렇게 재미있던 적은 없었습니다." 31세의 스트라이커는 이제 비장하기보다 즐겁게 축구를 한다.

■김은중이 날고 있다

김은중이 날고 있다. 올 시즌 22경기를 뛰며 11골 7도움을 기록했다. 공격 포인트 순위에서 데얀(서울·23경기 14골 9도움), 루시오(경남·21경기 12골 6도움)에 이어 3위다. 외국인 선수를 제외하면 최고 성적이다.

김은중이 날자 팀도 동반 상승했다. 11승4무3패(승점 37)로 리그 2위이다. 지난해 15개 팀 중 14위였던 걸 생각하면 '반란'이나 다름없다. 새로 온 박경훈 감독이 스페인식 패스 게임을 지향하는 제주에서 김은중은 공격의 꼭짓점이다.

1일 제주 서귀포 클럽하우스에서 만난 김은중은 "나도 이렇게 빨리 팀 조직력에 녹아들지는 몰랐다"고 했다. 그는 지난달 30일 대전전에선 후반 2도움으로 통산 91골·40도움을 기록, 역대 10번째 '40득점·40도움' 클럽에 이름을 올렸다.

■새 도전을 위해 중국으로

"숫자에 크게 연연하지 않지만 이 기록만은 자랑스럽네요. 13년 동안 쌓아올린 숫자잖아요." 한 시즌도 거르지 않고 15경기 이상을 뛰어온 그에게 2007년 고비가 찾아왔다. 오른쪽 무릎 십자인대가 끊어진 것이다.

서울은 재활을 마치고 돌아온 그를 후반 교체용 선수로 뛰게 했다. "20분만 뛰는 '조커'도 나쁘진 않았습니다. 체력적인 부담 없이 연봉도 받을 만큼 받았거든요." 하지만 더는 가슴이 뛰지 않았다. 그는 새로운 도전을 택했다.

2009년 김은중은 중국 창사(長沙) 진더로 이적했다. 리그 중하위권 팀으로의 이적에 '김은중이 갈 데까지 갔다' '노후 대책을 위해 중국으로 갔다'는 얘기까지 나왔다. 음식도 입에 맞지 않고 숙소와 훈련장이 70㎞나 떨어져 있었다.

그런데도 김은중은 변화를 즐겼다. 시즌 30경기 중 28경기를 뛰며 8골 3도움을 올렸다. "그때 교체용에서 90분용으로 체력이 바뀐 거죠. 중국에서 흘린 땀이 아니었다면 올 시즌 이렇게 뛰지 못했을 겁니다. 하하."

■샤프라 불리던 사나이

팀 최고참인 그도 90년대 말엔 동갑 이동국과 함께 한국 축구의 '젊은 피'였다. 1998년 허정무 감독의 눈에 들어 대표에 뽑혔고 이듬해 세계청소년대회에서도 활약했다. 뾰족한 눈매와 송곳 같은 결정력에 '샤프'라는 별명도 얻었다.

2001년엔 왼쪽 눈이 안 보인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중학교 3학년 때 공에 눈을 맞은 후유증으로 망막이 떨어져 나간 뒤 98년 왼쪽 시력을 잃었다. 당시 의사가 "심한 운동을 하면 시력 손상이 빨라진다"고 경고했다.

"그래도 축구를 포기할 순 없었어요. 인기에 취해도 봤지만 그보단 절박함이 앞섰어요. 축구와 왼쪽 눈을 바꿨으니 어떻게 열심히 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지금도 그는 하프 라인에 서면 골대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아직 할 게 많은 축구 인생

김은중은 꾸준하지만 강한 임팩트를 보여주진 못했다. 2002 부산아시안게임, 2004 아시안컵에 나섰지만 월드컵 본선 무대는 한 번도 밟아보지 못했다. 국가대표보다는 국내 리그에 어울리는 선수라는 평가도 들었다.

"월드컵이 다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반짝하고 떴다가 한순간에 사라지는 것보다 제가 가는 길이 훨씬 행복한 것 같습니다. 대전과 서울에서 뛰며 많은 사랑을 받았잖아요. 월드컵이요? 지도자로 밟죠, 뭐."

아직 리그에서 이룰 것이 많기에 게으름을 피울 수 없다. 한 번도 올라보지 못한 K리그 정상의 꿈을 이루고 싶고, 통산 100호골(현재 91골)도 터뜨리고 싶다. "아직 못 이룬 꿈이 너무 많아요. 그 설렘에 공 차는 것이 즐겁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