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에서 긍정을 발견하는 힘 '골든 슬럼버'

낙관성의 실용성. 그러니, 첫번째 질문은 이렇다. '너무 말랑한 거 아니야?' 장르적 기대에 따라서는 그렇다. 그런데 이 영화에 대해서는 장르를 벗어난, 또 하나의 질문이 있다. 살인과 음모, 생존을 위협하는 폭력과 공권력, 절박한 도주, 절망과 무력감, 불신과 인간성 파괴 등 어둡고 악해 보일 수 밖에 없는 소재들 속에서, 어떻게 꿋꿋한 긍정의 힘을 뿜을 수 있냐는 질문이다. 사실 총리 암살 사건의 포위망을 빠져나가 도망친 이후에도 아오야기의 삶이 훌륭하거나 멋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아오야기는 성형을 해서 외모를 바꾸고 도주했으며, 이제 신분을 증명할 길이 없으니 급여 수준이 낮은 잡역부 일로 근근이 산다. 단지 대항할 수 없을 듯한 거대한 공권력을 피해 살아 남았다는 것 외에는 아무 보상이 없다. 어쩌면 비루한 처지라 할 수도 있다. 그런데도, 주변 인물들과 아오야기는 모두 참으로 안도하고 기뻐한다. 이쯤에 이르면 어떤 의미에서 < 골든 슬럼버>가 전하는 메시지는 단순하기마저 하다. 친구 모리타의 말처럼, 혹은 병원에서 만난 뒷골목인생 노인의 말처럼, '개똥 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은 거다. 포기하지 마라.'

부조리한 현실 앞에서 아오야기와 그의 지인들이 보인 태도는 어이 없을 정도의 긍정과 낙관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 계몽적 등장 인물들이 유치한 것을 알면서도 위로가 되는 것은 왜일까? 낙관주의와 비관주의에 대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 심리학자가 있었다. '인간의 약점과 부정적인 동기를 확실한 것으로 보는 반면, 인간의 강점과 미덕을 완전한 환상으로 보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이것은 긍정 심리학을 태동시킨 마틴 셀리그만(Martin Seligman)의 질문이었다. 긍정심리학을 주장하는 학자들에 따르면, 낙관성은 행복과 삶의 만족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다(Diener등, 1999). < 긍정적 환상>의 저자 테일러(Talyor, 1988)는 정확한 자기평가보다도 긍정적인 편향이 차라리 삶에 유익하다고 주장했다. 단 긍정 편향의 태도가 바우마이스터(Baumeister, 1989)가 제안한 '긍정적 환상의 적정 경계선'만 지킬 수 있다면 말이다. 여기서 '경계'란 실제의 부정적 정보와 피드백을 수용할 수 있는 범위까지다. 결국 어차피 같은 현실이라면 판단력을 잃지 않는 범위에서 최대한 낙관성을 발휘하는 것이 고통과 스트레스를 이기기에 낫다는 의미일 것이다.

비틀즈의 노래 < 골든 슬럼버>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젊은 시절, 그들이 품었던 이상과 우정에 대한 헌화다. 노래를 만든 폴 매카트니는 멤버들이 불신과 갈등의 잠에서 깰 때, 다시 '미소'짓기를 바랐다. 혹시 현실에서는 반목과 냉소만을 본다 하더라도, 신뢰와 희망을 상상하는 쪽이 의심과 절망을 상상하는 쪽보다는 행복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박근영< 심리학박사ㆍ분당 제생병원 정신과 >

꼭 살아 남아, 아오야기. 아오야기는 오랜만에 만난 대학 친구 모리타와 함께 차 안에서 비틀즈의 < 골든 슬럼버>를 흥얼대고 있다. 그 때 근처에서 젊은 신임 총리가 퍼레이드 도중에 폭탄 테러로 사망한다. 연이어 친구 모리타의 차도 폭발한다. 그리고 이 사건들의 범인으로 아오야기가 지목된다. 영문도 모르는 그는 이제 필사의 도주를 시작한다. 조작된 거짓 증거가 속속 제시되고, 아오야기는 궁지에 몰린다. 도망치던 그는 절망한다. 절망의 순간에 그가 떠올린 것은 과거의 행복했던 순간이다. 행복했던 기억 속에는 절친했던 대학 동아리 회원들, 모리타, 가즈 그리고 연인 하루코가 함께 있다. 그때는 삶이 가능성으로 열려있었다. 그러나 대학을 졸업하고 서로 안부도 모른 채 몇 년, 이제 아오야기는 예상치 못한 막다른 골목에 몰려있다.

'증거야 얼마든지 만들 수 있으니 죄를 인정하라'는 거대한 권력의 자장가에 무력하게 순응해서 잠들 것인가? 혹은 안락하다 여긴 요람 속의 단잠에서 깨어날 것인가? 거대한 공권력에 쫓겨다 지친 아오야기는 차라리 포기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옛 연인, 옛 친구, 옛 동료, 그리고 새로 만나는 사람들까지, 힘 없는 개인들은 한결같이 응원한다. "도망가서 살아 남아. 꼭 살아 남아, 아오야기."



영화 vs. 소설. 권력의 음모가 평범한 택배회사 직원 아오야기의 삶을 순식간에 무너뜨릴 듯이 보인다. 그러나 아오야기가 지나온 시간 곳곳에서 만났던 사람들이 그의 인생을 다시 떠받쳐준다. 추격자들은 대학 동아리 멤버들을 위협하고 폭력을 행사한다. 그러나 이들이 함께 즐겨 들었던 < 골든 슬럼버>는 보이지 않는 끈으로 다시 이들을 연결한다. 이들이 믿는 것은 습관과 신뢰다. 아오야기에 대한 이들의 신뢰는 폭력과 거짓 이미지보다 강하다. 영화에서 세 번쯤 가슴이 따뜻해 진다. 낡고 녹슨 노란 자동차에 시동이 걸릴 때, 아오야기의 아버지가 인터뷰를 할 때,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수구 곳곳에서 불꽃이 튀어 올라 검은 하늘에 펑 하고 밝게 터질 때다.


아사코 코타로의 원작 소설과 비교해 볼 때, 나카무라 요시히로 감독은 소설과는 약간 다른 < 골든 슬럼버>를 만들었다. 소설에서는 '스릴러'와 '인간애에 근거한 신뢰'가 튼튼한 두 개의 골격을 이뤘다. 소설에서 스릴러의 긴장은 공권력과 개인간의 추격과 도망에서 나왔었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감시-거짓-폭력과 권력'으로 개인을 무력화시키는 거대하고 부당한 공권력 묘사가 대폭 줄었다. 우선 센다이 시내 전체를 도청, 녹화, 감시하며 아오야기의 동선을 바짝 뒤쫓던 시큐리트 포트가 사라졌다. 또한 권력을 가진 추격자들의 압박과 폭력이 줄었다. 예를 들어, 후배 가즈를 혼수상태에 빠뜨리는 고문과 폭력이 지극히 은은하게 깔려있고, 추격자들이 옛 연인 하루코의 아이까지 납치하려 했던 행동도 빠져 있으며, 빨간 헤드폰 장총의 무차별 난사와 살생도 거의 생략되어 있다. 그리고 아오야기의 소심하지만 살기 위한 절박한 육탄전과 달리기도 줄었다. 대신 영화는 인간적 신뢰의 축을 대폭 살렸다. 소설에서 인간적 드라마를 비중 있게 취하고, 소설에는 없었던 따뜻한 에피소드를 더하기도 했다. 반면 스릴러적인 요소를 줄였다. 관람 도중 가끔 감동하고, 가끔 웃는 것은 좋지만, 명색이 스릴러 원작인데, 긴장마저 '가끔'이라는 것은 약간 난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