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결에서 지면 깨끗이 승복 이것이 미(美) 사법 지탱하는 힘"

"2000년 미국 대선 때 앨 고어 후보가 승복한 건 투표 결과가 아니라 판결이었습니다. 연방대법관 1명이 미국 역사를 바꿔 놓은 것이죠."

미국변호사협회(ABA) 스티븐 잭(Stephen N. Zack) 회장은 "판결에 대한 승복 문화가 미국 사법시스템을 지탱하는 힘"이라고 강조했다.

대한변협(회장 김평우) 주최 변호사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한 잭 회장은 2000년 미 대선 때 앨 고어측에 서서 '플로리다주 1차 표 불복 소송'의 변호인을 맡았던 인물이다. 그는 "비록 소송에선 졌지만, 우리가 당시의 분란을 총과 칼이 아닌 법으로 해결했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고 했다.

당시 고어 후보는 당락을 좌우할 플로리다주 개표 결과에 오차가 있음이 일부 확인되자, '수작업 재검표'를 위한 법정 투쟁에 나섰고, 연방대법원은 5 대 4로 부시의 손을 들어줬다. 연방대법관 1명이 '캐스팅보트'를 행사한 것이다. 참담했지만 고어는 하루 만에 "당파심이 애국심을 앞설 순 없다"며 부시에게 축하인사를 건넸다.

쿠바 출신인 잭 회장은 14세 때 카스트로 독재를 피해 미국으로 피난와 정착했다. 그는 그래서 "민주주의가 얼마나 소중한지 누구보다 잘 안다"고 했다. 미국 사법제도는 우리와 많이 다르다. 대부분의 주에서 법관을 선거로 뽑는다. 따라서 '민주적 정당성'은 확보되지만 판사가 정치성을 띤다는 지적이 있다. 잭 회장은 이에 대해 "판사 후원금 제한, 후원자 관련 사건 재판금지 같은 제한을 둬서 독립을 보장하고 있다"며 "철저히 검증된 명망 있는 법조인이 후보로 추천되므로 자격없는 법관이 나올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했다.

그는 미국서 법관이 신뢰를 얻는 또 한 이유로 투명한 판결문 공개를 꼽았다. "판결 공개는 판결의 일관성(consistency)과 투명성(transparency), 예측가능성(predictability)을 확보하고, 부와 권력에 따라 결론이 달라지지 않음을 보여주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잭 회장은 "미국에서 '재판은 공적 과정'이라는 사회적 합의가 있어 법정에선 프라이버시가 없다"며 "미성년자 이름, 개인 은행계좌 등 꼭 보호해야 할 사항이 아니면 모두 공개한다"고 했다. 이어 "한국도 로스쿨 도입으로 변호사가 늘어나면 서민이 저렴하게 법에 접근할 수 있다"며 "사회 곳곳에 '법에 의한 지배'(rule of law)가 스며들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