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0.09.08 11:19

◇영화 '킬러스' 스틸사진.

프랑스 남부 휴양지가 햇빛을 받아 반짝인다. 이런 풍광 속에서 오픈카를 타고 질주하면 가슴 가득 바람이 안기듯 저절로 사랑과 행복한 결혼이 생겨날까?

◇영화 '킬러스' 스틸사진.
첫 장면은 비행기 안. 가족이 니스로 휴가를 떠난다. 그런데 부모 사이에 끼어 앉은 딸의 표정은 불편하기만 하다. 딸의 이름은 젠(케서린 헤이글). 컴퓨터 소프트웨어 개발에 종사하는 바른 생활 여성이다. 젠이 불편한 이유는 부모의 지나친 간섭 때문이다. 부모는 젠을 물가에 내놓은 아이 다루듯 한다. 보수적인 부모의 기대에 따라 규범적인 생활을 하던 그녀가 휴양지에서 한 남자에게 첫눈에 반한다. 상대는 스펜서(에쉬튼 거처). 정체불명의 몸짱 청년이다. 스펜서는 남들 노는 데서 근무 중이다. 직업은 전문 킬러, 14번째 타깃을 제거 중이다. 특이한 직업에 종사해온 그는 평범하게 살아보는 것이 꿈이다. 평범한 것이 따분한 젠과 일탈이 지겨운 스펜서는 서로 끌리고 사랑에 빠져서 단기간에 결혼에 이른다. 과연 이들의 결혼 생활은 평탄할까?

< 킬러스>는 마치 부부상담 과정을 보는 것 같다. 상담과 다른 점은 말보다는 액션이라는 점 정도다. 영화에서는 커플의 연애와 결혼, 갈등과 화해, 그리고 기대변화와 역할 재구조화까지를 보여준다. 전직 킬러 사위가 처가의 가족이 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정을 보자.

젠의 원 가족은 부모-자식의 유대가 지나치다. 젠의 일상은 늘 부모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젠의 부모는 딸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쏟는다. 젠은 이런 부모의 애정이 고마우면서도 지나친 배려가 부담스럽다. 그녀는 투덜거리면서도 부모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한다. 독립적인 자기 주장을 못하는 젠은 상황이 곤란하거나 부모에게 화가 나면 토하는 신체화 증상이 있다. 그러면서도 부모 없이 혼자서 결정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 의존적이다. 높은 곳에는 올라가지도 못하는 고소공포증이 있다. 그러니 집을 떠나서 멀리 가기는 어렵다. 그녀는 부모로부터 독립하기 어려운 조건을 두루 갖춘 셈이다. 그러니까, 젠은 성인이지만 자신의 부모로부터 개별화된 인격을 갖지 못한 상태다. 이런 젠이 결혼을 통해 부모로부터 독립할 수 있을까? 또한, 이러한 젠의 가족 구조 내에서 스펜서는 제대로 된 남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까?

◇영화 '킬러스' 스틸사진.
결혼 후 3년, 이 새내기 부부는 젠의 친정 집 근처에서 살고 있다. 젠의 부모는 이 부부의 생활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없다. 젠은 여전히 사소한 일도 부모와 상의한다. 젠의 아버지는 옷차림에서부터 일에 이르기까지 스펜서에게 이런저런 충고를 한다. 젠과 스펜서의 사생활에 불쑥 끼어들고 간섭하는 것은 마을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이들 부부는 3년 동안 독립된 가정을 이루기는커녕, 대인관계도 일상도 일도 모두 부모와 마을 사람들과 엉켜있다.스펜서는 이제라도 가장선언을 할 것인가, 아니면 있는 듯 없는 듯 살 것인가? 이런 갈등이 생길 때 쯤에 젠과 스펜서는 이웃 때문에 고민하기 시작한다. 어느 날, 친구와 이웃이라 여긴 사람들이 갑자기 스펜서를 죽이려고 덤벼들기 시작한 것이다. 칼로 찌르고, 총으로 쏘고, 차로 들이 박는다. 마을 사람들이 저마다 스펜서를 죽이려 하는 기이한 행동은 킬러가 아니라 좀비처럼 보일 지경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지경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젠과 스펜서가 자신들의 결혼과 관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한다는 점이다. 또한 이 시점은 젠이 임신을 해서 젠과 스펜서가 부모가 되어야 하는 때이기도 하다.

스펜서를 죽이려는 이웃집 킬러들은, 한번만 뒤집어 보자면, 실은 이들 부부가 독립적인 새로운 가정을 이루는 것을 방해하던 사람들이다. 이 방해꾼들을 고용한 사람은 장인인 젠의 아버지이다. 이 모든 일은 젠의 아버지가 사위를 시험하고 감시하기 위해 꾸몄다. 그러니 방해꾼인 이웃 킬러들을 죽이는 것은 결국 젠과 스펜서가 가정을 이루려는 과정이다. 그러니까, < 킬러스>의 액션 장면들은 '딸을 과잉보호하고 의존적인 아이로 남겨두려는 부모'와 '딸을 사랑해서 가정을 이루려는 사위' 사이의 갈등과 투쟁을 화끈하게 보여주는 셈이다. 믿을 수 없다면 이 장면을 보라. 권총, 장총, 연발총과 육탄전까지 한바탕 액션 끝에, 이 가족들이 총을 쥐고 거실에 모여 앉아서 가족 상담을 진행한다. 이 상담의 리더는 젠이다. 젠이 가족을 향해 털어놓을 일이 있으면 털어놓으라고 하자, 가족들은 저마다 이해를 구하는 이야기와 애정 표현을 한다. 그리고 젠은 확실한 자기 주장과 감정 표현을 보여준다. 이상의 과정을 통해 가족간의 갈등과 화해, 새로운 역할 정립이 일어난다. 비로소 스펜서가 진짜 남편, 진짜 사위가 되는 순간이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사위가 자기 아이에게 장인보다 더한 감시망을 작동시키는 것이다. 아마 앞으로 스펜서의 부모 노릇은 젠의 부모에게 배운 것보다 더 심할 듯하다.

< 킬러스>는 액션은 흘러가고 부모-자식 관계가 남는 영화다. 액션에 세대가 엮이고, 가족간의 역기능적 기대와 불안이 얽힌다. 포장은 액션인데 액션에 몰입하기 어려운 이유다. 젠의 부모는 요즘 사회면에 종종 등장하는 '헬리콥터 부모'다. 그들은 자식이 걱정 되어서 근거리에서 쫓아다니며 간섭하고 도와준다. 그러나 가족에 대해 소속감을 갖는 것과 원 가족으로부터 아예 분화되지 못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부모 입장에서는 애정이라 여기겠지만, 성인이 되고 가정을 이룬 자식에게 이런 부모역할을 하는 것이 건강한 관심과 애정일까? 부부가 되는 것, 부모가 되는 것, 그리고 부모-자식 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모두 어렵다. 어쩌면 이 과정은 <킬러스>의 액션을 닮았을지도 모른다. 새로울 것도 없고 힘 빠지게 지루하지만, 사라지지 않는 연속적 난제라는 점에서 말이다. 참,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자면, 니스 해변에서 '낭만적인 사랑에 빠지는 것'과 '좋은 부부- 좋은 부모 되기'는 별 상관이 없다. 다행스럽게도.

<박근영 심리학 박사ㆍ분당제생병원 정신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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