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이야기] 노숙인 家長 8년만의 성묘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내린 지난 19일 오후 2시쯤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의 야산 중턱 공동묘지에서 까만 비닐봉지를 든 정장 차림의 중년 남성이 다리를 절며 묘를 찾고 있었다. 한참 왔다갔다하던 최경석(60·가명)씨가 한 무덤에 멈춰 섰다.

우산을 내려놓은 최씨는 봉지 안에서 배와 떡, 소주를 꺼내 무덤 앞에 놓으며 말했다. "아버지는 소주를 좋아하셨지. 병에 시달리던 아버지는 말씀을 제대로 못해 늘 손으로 나를 다독여 주셨어…." 최씨는 봉분을 어루만지며 잿빛 하늘을 쳐다봤다. 노숙 생활을 한 지 8년 만에 찾은 아버지 묘였다. 두 번 절을 하곤 손으로 눈가를 훔쳤다.

최씨는 18세이던 1968년 고향인 전라북도 부안을 떠나 충청남도 예산에서 주방일을 시작했고, 1991년엔 66㎡(20평) 남짓한 한식당을 열었다. 빚까지 내서 어렵게 시작했지만 식당은 잘 되지 않았다. 식당 매상으로는 사채 이자를 갚고 월세를 내기도 벅찼다. 스트레스를 받은 최씨는 뇌출혈로 2번 쓰러져 한 달 넘게 병원 생활도 했다. 죽을까도 생각했지만 가족들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최씨는 2002년 2월 집을 나와 서울로 올라왔다. 영등포 노숙자 쉼터에서 노숙 생활을 시작했다. 영등포 인력시장을 전전했지만 3개월 만에 그마저 더 할 수 없었다. 처음 해보는 중노동에 무릎을 다친 것이다.

최씨는 강원도로 갔다. 공공 근로사업인 '인제숲 가꾸기'에 지원해 그곳에서 다른 노숙인들의 배식을 담당했다. 집에 연락을 끊었던 최씨는 1년 2개월째인 2003년 4월 초 숙소에서 예산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부인은 화를 내며 "어디냐, 왜 전화했느냐"고 따졌고, 최씨는 "오늘이 딸 생일이라…(전화했다)"고 했다. 부부는 전화기를 붙들고 울기만 했다. 가족들은 그제야 최씨가 노숙 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최씨가 가출한 뒤 가족들은 부인이 식당에서 주방일을 하며 33㎡(10평) 단칸방에서 근근이 살았다.

최씨는 그 뒤 가족들과 1년에 1~2번씩 연락했다. 그의 세 딸은 "우리 가족 서로 떨어져 있어도 화목하게 살아요. 사랑해요 아버지"라고 쓴 편지를 보냈다. 편지는 최씨가 노숙 생활을 하면서도 늘 품 속에 간직하는 보물이었다. 최씨는 그때부터 다른 노숙인처럼 술과 도박에 빠지지 않았다. 열심히 일해 번 돈을 아껴 세 딸 학비에 보탰다. 지금 첫째 딸은 대학을 졸업해 직장에 다니고, 두 딸은 대학생이 됐다.

최씨 가족은 지난 8월 말 경기도 양평군의 80여㎡(24평)의 집에 다시 모였다. 서울시에서 일부 노숙인들에게 '자활의 집'을 제공하면서 최씨에게도 한 채를 내준 것이다. 자활의 집은 쉼터에서 3개월 이상 생활한 노숙인 중 자활 의지가 강하고 일정 금액 이상 저축액이 있는 사람에게 내준다. 2년씩 계약해 2번까지 연장할 수 있고 최대 6년간 살 수 있다.

양평 노숙인 쉼터에서 "성실히 일하고 저축도 잘한다"며 가족이 있는 최씨를 서울시에 추천했다고 한다. 최씨가 3년 전부터 공공근로를 하며 번 돈 80만원 중 적금과 주택청약으로 한 달에 각각 30만원, 10만원씩 저축해왔고, 한 달에 12만원씩 빚을 갚고 있어 8년만 있으면 신용불량자 신세를 벗어나는 점을 인정받은 것이다.

최씨가 지난 8월 새집에 입주하기 전 "곧 집이 생긴다"고 말하자 부인과 세 딸은 처음엔 믿지 않았다. 최씨가 그동안 어렵게 저축하며 새 삶을 준비했다는 이야기를 하자 부인과 딸들은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부인은 "당신 대단하다"며 최씨를 부둥켜안고 한참이나 울었다. 새집으로 이사한 뒤 세 딸은 "처음으로 우리 방이 생겼다"며 집안을 뛰어다니며 좋아했다고 한다. 최씨는 이번 추석엔 세 딸 손을 잡고 전북 부안의 어머니 묘소도 찾을 계획이다. 최씨는 "이제는 정말 제대로 살아야지"라며 "딸들 번듯한 직장 잡고 시집 가는 것까지 꼭 봐야 하니까"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