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비판 대신 사랑·이별 담았어요"

가수 이적(본명 이동준·36)이 엘레지(Elegy·悲歌)를 부른다. 그는 4집 앨범 '사랑'에서 이별 후의 혼란과 고통, 그리고 공허를 전하는 데 온 마음을 쏟았다. 깔깔한 목소리로 사회와 인생에 대한 서늘한 비판과 성찰을 쏟아내던 1990년대 패닉(Panic) 시절의 그를 추억하는 사람이라면 난감할지도 모른다.

물론 듣는 이의 허를 찌르는 음악적 기지는 곳곳에서 번뜩인다. '이별 노래는 발라드'라는 장르적 관성부터 조각조각 깨부쉈다. 록, 뉴웨이브, 포크의 요소가 고루 담긴 노래들은 이별의 비감(悲感)을 눅눅한 기운 없이 청명하게 전한다. 가사와 곡조의 기묘한 대비가 빚어내는 긴장감은 오랜 잔상(殘像)으로 이어진다. 29일 오전 서울 여의도 자신의 소속사 사무실에 나타난 그는 "대중음악의 본령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랑과 이별 노래로 정면승부를 해보고 싶었다"며 웃었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남녀 간의 사랑과 이별을 묘사한 노래가 가장 많이 만들어지고 불리는 데는 이유가 있겠죠. 인류의 보편 감성과 통한다는 말입니다. 사회 비판적인, 메시지를 담은 노래는 언제든 날카롭게 쓸 자신이 있어요. 하지만 요즘은 동서고금(東西古今)의 수십, 수백만의 사랑과 이별 노래들과 경쟁해서 빛날 수 있는 노래로 자취를 남기고 싶다는 욕망이 강하죠."

그는 "1990년대와 비교해 지금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회를 향해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여건이 된 것 같아 노래로 누군가를 대변해야 한다는 강박감이 많이 사라졌다"며 "사람들 마음속에 오래 살아남는 노래가 어떤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새 앨범에 반영됐다"고 덧붙였다.

이적의 변화는 이미 3년 전 시작됐다. 3집 '나무로 만든 노래'에서 소리보다 여백이 더 많은 기타와 피아노 선율 속에 사랑의 설렘과 환희를 전했고 팬들은 환호했다. 가요 순위를 단 한 차례도 제패하지 못했지만 연인들 마음과 입을 통해 전해지며 최고의 '고백송'으로 자리 잡은 '다행이다'의 가마솥 인기는 자신감의 원천이다. 그는 "이렇게 크게 히트할 거란 생각은 전혀 못했는데 2000년대 들어 대중과 멀어진 듯 보였던 제 이미지를 한순간에 뒤집어버린 고마운 노래가 됐다"며 "패닉 시절의 '달팽이'와 함께 가수 이적의 대표곡이 됐다"고 했다.

이 노래는 지금은 아내가 된, 당시 여자친구의 존재에 대한 감사를 담아냈다. 이제 두 사람은 갓 100일을 넘긴 딸을 둔 부모가 됐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 다행이다. 다만 한 가지 궁금한 건, 결혼 이후 왜 사랑에 비관적인 노래가 많아졌느냐는 것이다. '다툼'이라는 노래 속에는 "얼마나 많은 다툼 뒤에 우린 비로소 뉘우칠 수 있을까"라는 가사까지 나온다. 그가 쿡쿡 웃었다.

"이 노래를 듣고는 아내가 '이거 내 얘기야?'라며 따지기도 했죠. 전혀 아니거든요. 결혼하고 나서 11평짜리 작업실을 하나 마련했어요. 음악에 전념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으니까요. 그런데 거의 매일 그곳에 틀어박힌 채 고독하게 음악을 만들다 보니 쓸쓸하고 스산한 감성에 침잠하게 되더라고요. 어쨌든 이 앨범 때문에 아내는 걱정이 많습니다, 하하."

"한때 나 스스로를 가수보다 창작자로 여겼다"는 그의 노래는 앨범이 나올 때마다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가늘고 카랑카랑했던 음색이 이제는 노래의 성격에 따라 깊고 웅장하게 때로 차분하고 사근사근하게 변모한다. 그러면서도 친구에게 이야기하듯 편안하게 노래하는 개성은 여전하다.

"노래는 부를수록 느는 것 같아요. 확실히 목도 더 튼튼해졌고 기교도 다양해졌어요. 그러다 보니 좀 더 다양한 장르의 노래를 쓸 수 있게 됐고요. 무엇보다 이 나이에 몸으로 하는 것 중에 연습할수록 확연히 좋아지는 게 있다는 게 신기해요. 제가 야구선수였다고 생각해보세요. 마흔 다 돼서 아무리 몸이 부서져라 공을 던져도 스피드가 더 나올 리 없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