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김형석의 후아유] 배우 김혜옥_"독한 연기 끝나니 연애 끝난 것처럼 아파요"
입력 : 2010.10.02 03:27
올해 브라운관에서 가장 강렬했던 캐릭터를 꼽으라면 아마도 '나쁜 남자'의 신 여사일 것이다. 목에 굵은 핏줄이 툭툭 튀어나올 정도로 고함을 지르고 절규했던 이 캐릭터는 김혜옥(52)의 재발견이었다.
'올드미스 다이어리'(2004)의 푼수 할머니나 수많은 작품에서의 엄마 역할로 김혜옥의 이미지를 입력하고 있던 사람에겐 파격을 넘어 어떤 충격을 경험했을 것이다. 그 뜨거운 시간을 뒤로하고 지금은 아침 드라마의 엄마 자리로 돌아갔지만, 김혜옥에게 신 여사의 잔상은 쉽게 지워지지 않은 듯하다.
'올드미스 다이어리'(2004)의 푼수 할머니나 수많은 작품에서의 엄마 역할로 김혜옥의 이미지를 입력하고 있던 사람에겐 파격을 넘어 어떤 충격을 경험했을 것이다. 그 뜨거운 시간을 뒤로하고 지금은 아침 드라마의 엄마 자리로 돌아갔지만, 김혜옥에게 신 여사의 잔상은 쉽게 지워지지 않은 듯하다.
"연애 끝난 것 같은 느낌 있죠? 흔히들 '시원섭섭하다'고 하는데 저는 아니에요. 그냥 섭섭해요. 헛헛하고. 이별하는 것만큼 아파요."
어느덧 연기 인생 30년. 지금은 한 편의 작품을 끝낸 후 이별의 아픔을 느낄 정도로 일과 삶이 하나가 되었지만, 그 시작은 운명적 우연이었다. 국어 시간에 선생님이 책을 읽으라고 하면 읽다가 부끄러워서 울어 버릴 정도로 내성적이었던 그녀가 배우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건, 고등학교 졸업 후 취직한 출판사의 맘 좋은 사장님 덕분. 당시 일러스트를 그리던 김혜옥은 사장님의 배려로 직장과 대학 생활을 병행할 수 있었고, 서울예전의 (지금은 없어진) 야간 학부에 들어갔다.
"그렇게 미대에 갔는데, 교수님 눈엔 내가 별 소질이 없어 보였나 봐요.(웃음) 어느 날 연기가 더 맞아 보인다며 아예 연극과 교수님께 말씀을 해주셨어요. 거의 반강제로 연극과를 다니게 된 거죠."배우는 꿈조차 꿔본 적 없는 김혜옥에게 연극과 생활은 쉽지 않았다.
"처음엔 '왕따'였어요.(웃음) 제가 너무 못하니까 아무도 같이 안 하려고 했죠." 배우보다 스태프 쪽을 권유받던 시절, 송혜숙 교수만은 "넌 꼭 배우 해야 한다"며 격려했고, 한 연출가를 만나 혹독한 스파르타식 훈련을 거쳐 졸업 후엔 백상예술대상 신인연기상을 수상할 정도로 촉망받는 연기자가 되었다.
김혜옥은 무대 경력을 토대로 20대 후반에 MBC에 특채 탤런트로 들어갔다. 갑자기 가세가 기울면서 내린, 현실적 결단이었다. 이때 만난 '전원일기'는 그녀에게 애증의 대상이다. 12년 동안 고정 수입이 생겼지만 다른 드라마에서 아무리 좋은 역을 해도 그녀는 '서울댁'이미지로 굳어져 버렸다.
"연극 쪽에서 욕 많이 먹었어요. 키워놨더니 드라마에서 빨래나 하고 있다고.(웃음)"그녀를 아끼는 지인들은 그거 아니면 못 먹고 사냐며 그만두라고 했지만, 정말로 '그거 아니면 못 먹고 살던'시절. 격려했던 선배들이 없었다면 그녀는 콤플렉스 속에서 애초에 탤런트를 그만두었을지도 모른다. "아무도 저를 신경 쓰지 않을 때 김혜자 선배님이 '넌 괜찮은 배우'라며 용기를 주셨어요. 이정길, 박근형 선배님도 큰 힘이 되었고요. 대한민국 최고의 배우였던 그분들의 말이 정말 사무치게 감사했죠."
하지만 아직 그녀의 시대는 오지 않았고, 개인적으로 힘든 일을 겪으면서 40대 초반엔 3년 가까이 병상에 누워 있었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고, 이러다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 어떤 병원도 병명을 밝히지 못했다. 이때 한의원에서 '화병'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마음의 병. 원래 불자이긴 했지만, 그녀는 좀 더 깊이 불교를 받아들이며 기도와 명상을 통해 스스로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내면의 평화가 깃들자 건강을 되찾았고, 점점 그녀의 시간이 다가왔다. 40대 중반의 여배우가 드디어 자신의 목소리를 가지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올드미스 다이어리'의 푼수 같은 할머니는 전환점이었고, 이후 스크린과 브라운관을 오가며 1년에 예닐곱 작품에 참여하는 다산성의 배우가 되었다. 특히 김혜옥이 만들어낸 엄마는, 이른바 '국민 엄마'로 표현되는 한국의 전통적인 어머니상과는 다른 독특한 질감의 캐릭터였다.
엄마 이전에 여자인, 강한 자아를 지닌 엄마. 자유롭게 연애하고, 술에 취하고, 딸에게 까칠하게 구는 엄마. 자신과 가장 근접한 캐릭터는 '연기가 필요 없고 그냥 나 자신'이라고 느꼈던 영화 '가족의 탄생'(2006)의 매자. 한편 드라마 '경성 스캔들'(2007)의 사치코처럼 만화 같은 캐릭터를 연기하는 모습에선, 이 배우의 스펙트럼엔 한계가 없다는 생각도 들게 했다.
김혜옥이 보여주는 연기의 자연스러움이 '꾸미지 말고 있는 그대로 보여주자'는 신조에 의한 것이라면, 그 캐릭터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중량감은 '연기는 가슴속에 많이 담아야 나온다'는 원칙이 만들어냈다. 그러기에 어떤 역할을 맡아서 어떤 연기자가 되겠다는 욕심은 없다. 주어진 역할 앞에서 최대한 채운 상태이길 바랄 뿐이다.
지난 30년의 연기 생활에 대한 짧은 소회를 청했다. "배우 생활하면서 연기 잘했다고 칭찬받았을 때 행복했던 것 같진 않아요. 대신 내 능력으로 가지게 된 걸 물질적으로 부족한 사람들에게 줄 때가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었어요." 배우로선 가득 채우지만 분장을 지운 후엔 비우고 나누는 삶. 힘들게 견뎠던 사연 많고 굴곡진 세월이 그녀에게 남긴 깨달음이다.
어느덧 연기 인생 30년. 지금은 한 편의 작품을 끝낸 후 이별의 아픔을 느낄 정도로 일과 삶이 하나가 되었지만, 그 시작은 운명적 우연이었다. 국어 시간에 선생님이 책을 읽으라고 하면 읽다가 부끄러워서 울어 버릴 정도로 내성적이었던 그녀가 배우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건, 고등학교 졸업 후 취직한 출판사의 맘 좋은 사장님 덕분. 당시 일러스트를 그리던 김혜옥은 사장님의 배려로 직장과 대학 생활을 병행할 수 있었고, 서울예전의 (지금은 없어진) 야간 학부에 들어갔다.
"그렇게 미대에 갔는데, 교수님 눈엔 내가 별 소질이 없어 보였나 봐요.(웃음) 어느 날 연기가 더 맞아 보인다며 아예 연극과 교수님께 말씀을 해주셨어요. 거의 반강제로 연극과를 다니게 된 거죠."배우는 꿈조차 꿔본 적 없는 김혜옥에게 연극과 생활은 쉽지 않았다.
"처음엔 '왕따'였어요.(웃음) 제가 너무 못하니까 아무도 같이 안 하려고 했죠." 배우보다 스태프 쪽을 권유받던 시절, 송혜숙 교수만은 "넌 꼭 배우 해야 한다"며 격려했고, 한 연출가를 만나 혹독한 스파르타식 훈련을 거쳐 졸업 후엔 백상예술대상 신인연기상을 수상할 정도로 촉망받는 연기자가 되었다.
김혜옥은 무대 경력을 토대로 20대 후반에 MBC에 특채 탤런트로 들어갔다. 갑자기 가세가 기울면서 내린, 현실적 결단이었다. 이때 만난 '전원일기'는 그녀에게 애증의 대상이다. 12년 동안 고정 수입이 생겼지만 다른 드라마에서 아무리 좋은 역을 해도 그녀는 '서울댁'이미지로 굳어져 버렸다.
"연극 쪽에서 욕 많이 먹었어요. 키워놨더니 드라마에서 빨래나 하고 있다고.(웃음)"그녀를 아끼는 지인들은 그거 아니면 못 먹고 사냐며 그만두라고 했지만, 정말로 '그거 아니면 못 먹고 살던'시절. 격려했던 선배들이 없었다면 그녀는 콤플렉스 속에서 애초에 탤런트를 그만두었을지도 모른다. "아무도 저를 신경 쓰지 않을 때 김혜자 선배님이 '넌 괜찮은 배우'라며 용기를 주셨어요. 이정길, 박근형 선배님도 큰 힘이 되었고요. 대한민국 최고의 배우였던 그분들의 말이 정말 사무치게 감사했죠."
하지만 아직 그녀의 시대는 오지 않았고, 개인적으로 힘든 일을 겪으면서 40대 초반엔 3년 가까이 병상에 누워 있었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고, 이러다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 어떤 병원도 병명을 밝히지 못했다. 이때 한의원에서 '화병'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마음의 병. 원래 불자이긴 했지만, 그녀는 좀 더 깊이 불교를 받아들이며 기도와 명상을 통해 스스로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내면의 평화가 깃들자 건강을 되찾았고, 점점 그녀의 시간이 다가왔다. 40대 중반의 여배우가 드디어 자신의 목소리를 가지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올드미스 다이어리'의 푼수 같은 할머니는 전환점이었고, 이후 스크린과 브라운관을 오가며 1년에 예닐곱 작품에 참여하는 다산성의 배우가 되었다. 특히 김혜옥이 만들어낸 엄마는, 이른바 '국민 엄마'로 표현되는 한국의 전통적인 어머니상과는 다른 독특한 질감의 캐릭터였다.
엄마 이전에 여자인, 강한 자아를 지닌 엄마. 자유롭게 연애하고, 술에 취하고, 딸에게 까칠하게 구는 엄마. 자신과 가장 근접한 캐릭터는 '연기가 필요 없고 그냥 나 자신'이라고 느꼈던 영화 '가족의 탄생'(2006)의 매자. 한편 드라마 '경성 스캔들'(2007)의 사치코처럼 만화 같은 캐릭터를 연기하는 모습에선, 이 배우의 스펙트럼엔 한계가 없다는 생각도 들게 했다.
김혜옥이 보여주는 연기의 자연스러움이 '꾸미지 말고 있는 그대로 보여주자'는 신조에 의한 것이라면, 그 캐릭터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중량감은 '연기는 가슴속에 많이 담아야 나온다'는 원칙이 만들어냈다. 그러기에 어떤 역할을 맡아서 어떤 연기자가 되겠다는 욕심은 없다. 주어진 역할 앞에서 최대한 채운 상태이길 바랄 뿐이다.
지난 30년의 연기 생활에 대한 짧은 소회를 청했다. "배우 생활하면서 연기 잘했다고 칭찬받았을 때 행복했던 것 같진 않아요. 대신 내 능력으로 가지게 된 걸 물질적으로 부족한 사람들에게 줄 때가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었어요." 배우로선 가득 채우지만 분장을 지운 후엔 비우고 나누는 삶. 힘들게 견뎠던 사연 많고 굴곡진 세월이 그녀에게 남긴 깨달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