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룡시네마] 박근영의 영화본심 : 인생에서 머쓱하고 헛헛한 순간들

홍상수 감독의 < 옥희의 영화>는 '거봐, 여전히 사는 게 좀 이상하지?'라고 또 한 번 어정쩡한 능청을 떨고 사라진다. 영화의 구성은 일종의 단편 소설집 같다. '주문을 외울 날', '키스 왕', '폭설 후', '옥희의 영회' 등 네 개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네 개의 이야기를 통해 등장 인물과 인물들의 관계는 지속적으로 변주된다. 등장인물은 진구(이선균), 옥희(정유미), 송교수(문성근)다. 동일한 배우가 동일한 이름으로 나온다. 진구와 송 교수는 상하관계, 진구와 옥희는 연인관계, 옥희와 송 교수는 상하관계이면서 연인관계다. 인물과 관계는 각 단편의 맥락에 따라 다른 이야기를 만든다. 또한 네 개의 이야기가 합쳐지면 새로운 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즉 아귀는 안 맞지만, 동시에 각각의 이야기가 엇비슷한 듯 다른 '가족 유사성'을 보이며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를 이루는 듯이 보인다.

< 옥희의 영화>를 보면 이야기가 있는 듯도 하고 없는 듯도 하다. 혹은 누구의 이야기인지, 반복적으로 모호해지기도 한다. 이 영화에서 홍상수가 분무한 파편들을 꿰맞추며 '안개-연기-연무'를 구별할 생각은 없다. 대신 다른 질문을 하나 해보고자 한다. 관객이 영화를 보면서 이야기가 '단순하고 명료하다고 이해하는 것'과 '모호하고 알쏭달쏭하다고 여기는 것'의 심리적 기준은 무엇일까? 따지고 보면, 관객이 보는 영화란 연속해서 돌아가는 필름과 소리의 조합일 뿐이다. 관객은 이걸 보고 어떻게 영화를 이해하게 될까?

영화를 이해하려면 관객의 입장에서 일단은 감각적 자극들이 지각적으로 의미 있게 조직화되어야 한다. 이러한 지각적 조직화의 원리를 형태주의 심리학자들은 '전경과 배경', '지각 집단화'의 두 가지로 설명했다.

첫째, '전경과 배경'의 원리는 영화 관람에서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가? 사람은 지각 장에서 전경을 파악한 후에야 비로소 전경을 중심으로 의미를 뽑아내고 이야기를 만들 수 있다. 대부분 영화에서 전경은 주인공 혹은 주요 등장인물이다. 인간의 정보처리 능력은 무한하지 않다. 대신 정해진 용량 내에서 최대한 효율적으로 작동한다. 그러므로 관객은 영화를 보면서 주인공 혹은 어떤 등장인물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배열한다. 이것이 영화 관람에서 전경 형성이며, 경제적으로 의미를 뽑아내는 방법이다. 그런데 < 옥희의 영화>에서는 단편마다 같은 인물이 나오지만, 전경은 자꾸 바뀐다. 예를 들어, 진구의 관점인가 하면 송 교수의 관점 같기도 하고, 그런가 하면 옥희의 관점이 된다. 이 영화에서 배경과 전경을 자꾸 바꾸는 것은 의도적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전경과 배경을 일정하게 유지해서 일관된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그보다는 전경과 배경만 살짝 바꿔도 일상에서 이해하고 있다고 자신하는 것들이 달라지는 것을 보여준다.

둘째, '지각 집단화'의 원리는 영화 관람에서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가? 지각 집단화란, 일단 전경이 형성되면, 전경을 근접성, 유사성, 연속성. 폐쇄성의 원리로 묶어서 조직화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사람들은 세계를 질서 있고 논리적인 방식으로 지각한다. 그런데 < 옥희의 영화>는 이러한 지각 집단화의 질서나 경제성에 대해서도 의도적으로 어깃장을 놓는다. 이야기는 네 개로 분절되면서 완결을 유추할 폐쇄성이랄 것이 없고, 한결같이 이어지는 좋은 연속성도 없다. 이야기가 가까이 배열되어 있다고 이해도가 높은 것도 아니고, 같은 사람이 같은 관계 속에 나온다고 해서 연관되어 있지도 않다. 그러니 <옥희의 영화>는 관객이 익숙한 방식으로 분류하고 분석하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대신 익숙한 지각과 사고 방식의 무력함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 옥희의 영화>는 애초에 부분을 연결해서 전체를 이룰 가능성이 없는 영화다. 대신 이 영화는 관찰자의 맥락과 참조체제만 남는다. 참으로 상대적이다. 예를 들어, '주문을 외울 날"에서 영화과 강사 진구에게 송 교수는 권위적 대상이다. 진구는 교수 임용 결정과정에서 송 교수의 비리가 있었는지를 캐묻는다. 그러나 진구 또한 자신의 학생이나 자기 영화 관객에게는 역시 권위적 대상이다. 관객은 진구의 스캔들을 캐물으며 도덕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송 교수도 자기보다 상대적으로 힘이 있는 위원회가 원칙을 지키지 않는다고 집요하게 비판한다. 그러니까 이들이 가진 권위의 위치는 모두 상대적이다. 또한 송 교수나 진구나 누가 더 나을 것도 없이 자신의 도덕성이 공격을 받는 것에 대한 대답은 엉뚱하거나 치졸하다. 송 교수의 대답은 "논리 공부를 더해라", 진구의 대답은 "이제 영화 안 만들거든요."다. 이러한 상대론적 순환은 단편마다 계속된다.

< 옥희의 영화> 전체에서 '전경과 배경의 역전 반복, 지각적 조직화의 교란, 상대적 맥락과 참조체제의 순환' 등은 모두가 심리적으로 단선적이고 인과적인 논리적 사고과정을 방해하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에서 혹시 무엇인가를 얻었다면, 그것은 질서 있고 명징한 이야기 이해가 아니다. 대신 맥락에 따라 바뀌고 재배열될 수 있는 개인적 통찰일 것이다. 예를 들어, 나는 '폭설 후'에서 송 교수가 하얀 눈에 토해낸 낙지가 살아서 꿈틀거리며 조명 아래서 머리를 갸웃거리는 장면에서 가장 크게 웃었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도 이 장면에서 나처럼 크게 웃었을까? 아마 각자 다를 것이다. 또한 이 장면에서 내가 도달했던 어떤 생각은 전체 영화와도 별 상관이 없을 수 있다.

개인적으로 홍상수의 영화적 시도들을 좋아한다. 홍상수는 알든 모르든 인생에서 피할 수 없이 머쓱하고 헛헛한 순간들을 심각하지 않게 잘 잡아낸다. 장점이다. 만약 홍상수 감독이 어느 날 번지르르한 신파조의 익숙한 이야기로 영화를 만든다면? 대실망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만약 김기덕 감독이 어느 날 코미디 영화를 들고 나온다면? '아 옛날이여'를 외칠 것이다. 자신의 장점으로 세상을 다양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세상을 풍요롭게 한다. 그러므로 나는 '홍상수가 홍상수답기'를, '김기덕이 김기덕답기' 빌 뿐이다.

　< 박근영 심리학 박사 >ㆍ청룡시네마 www.blueawar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