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순욱 기획팀장의 심층분석] 美경기 좋든 나쁘든 '弱달러'는 계속된다

미국 달러화의 글로벌 약세(弱勢) 현상이 가속화하고 있다. 특히 이번 달러화 약세는 미국 경제가 좋아져도 해소되기 어렵고, 미국 경제가 악화되면 더 심해질 수 있는 '양날의 칼'을 잡고 있는 형국이라는 점에서 주목되고 있다.

4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달러화 대비 원화 환율은 전날보다 8.1원 내린 1122.3원에 마감됐다. 지난 5월 4일(종가 기준) 1115.5원 이후 5개월 만에 가장 낮은 수준이다. 이날 1120원대 초반까지 떨어졌지만 외환 당국의 개입은 거의 없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 외환 당국의 환율 저항선이 1100원대로 낮아진 것이 아니냐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달러화 약세는 우리나라만의 현상이 아니다. 미국이 달러를 찍어 시중에 푸는 '양적 완화' 정책을 자주 시사하면서 글로벌 달러 약세 현상이 강해지고 있다. 상대적으로 다른 나라 통화 가치는 올라가고 있다. 벤 버냉키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은 지난 8월 말 "경기부양을 위해서 필요하다면, 추가적인 양적 완화조치를 공급하겠다"고 발언했다. 이후 9월 한 달 동안 달러화 약세가 지속돼 유로화는 달러 대비 7.6% 절상됐으며, 영국의 파운드화 역시 2.4% 올랐다. 아시아 통화 중에서는 중국 위안화가 이 기간 1.8% 절상됐고, 원화 가치는 5.1% 올랐다(환율은 하락). 아시아권에서는 원화의 변동 폭이 가장 큰 편이었다.

주요국 통화 대비 달러화 가치는 8개월 만의 최저치를 기록했다. 유로화·엔화 등 주요 6개 통화에 대한 달러화 가치를 나타내는 '글로벌 달러 지수'는 지난 1일(현지시각) 뉴욕 시장 종가 기준으로 78.044를 기록했다. 지난 1월 19일 이후 최저 수준이다. 미국이 양적 완화 조치를 준비하고 있는 것은 고용을 살리고 디플레이션(경기하락에 따른 물가하락)을 막기 위해서다.

◆코너에 몰린 달러화

버냉키 미 연준 의장이 최근 양적 완화 방침을 수차례 밝힌 것은 "국채 매입이든 다른 방식이든 상관없이 달러를 더 찍어내 시장에 공급하겠다"는 의미로 풀이됐다. 앞으로 공급량이 늘어날 달러화의 가치는 떨어지는 대신, 늘어나는 돈으로 주가를 비롯한 다른 자산 가격들은 오를 것이란 기대감이 확산됐다.

양적 완화 방침으로 유발된 달러화 약세는 앞으로 미국 경기가 좋아지든 나빠지든 당분간 지속될 것이란 관측이 많다. 미국 경제지표가 부진하게 나올 경우 미 연준은 경기 부양을 위해 양적 완화 조치를 더욱 적극적으로 취할 가능성이 커진다.

경기지표가 좋아져도 달러화가 약세를 피하기 어려울 것이란 전망이 많다. 경기회복세에 대한 기대가 주가를 끌어올리면서 신흥국 채권투자 등 위험자산에 돈이 몰리면 달러화 가치는 약세를 띨 것이라는 얘기다.

◆유로화·아시아권 통화는 절상 불가피

미 달러화의 약세 흐름이 지속될 것으로 예상됨에 따라 주요국들의 통화가치 강세는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유로화와 엔화는 최근 경기둔화를 감안하면 약세를 보이는 것이 정상적인 현상이다. 하지만 미국 달러화가 약세를 띠면서 상대적으로 이들 국가 통화 가치가 오르고 있고, 이런 현상은 당분간 계속될 가능성이 있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중국 위안화의 경우에도, '위안화 절상' 압력을 가하고 있는 미국 정부에 중국이 반발하고는 있지만, 점진적인 절상 흐름이 나타날 것이란 관측이 우세하다. 미국은 최근 인위적인 환율조작국에 대해 무역보복 제재조치를 가할 수 있는 '공정무역을 위한 환율 개혁법안'을 하원에서 통과시키면서 중국 위안화 절상 압력을 강화하고 있다.

원화 역시 강세 흐름은 이어질 것이란 전망이 많다. 원화의 경우 달러화 약세뿐 아니라 경상수지 흑자라는 요인이 작용하고 있다. 더구나 앞으로 금리가 올라갈 것이란 기대감도 원화 강세를 부추기고 있다.

◆외환시장 급변 가능성에도 대비해야

최근 서울 외환시장은 엄밀히 따지면 '원화 강세'가 아닌 '달러화 약세'로 봐야 한다. 우리나라 경제가 크게 개선돼 원화 가치가 올라갔다기보다는 미국 정부의 의도적인 달러화 약세 기조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눈여겨봐야 할 점은 달러화 약세로 국내로 들어오는 외국 단기자본이 많아질수록 외환시장이 나중에 불안해질 가능성이 커진다는 것이다. 삼성경제연구소 권순우 거시경제실장(상무)은 "당분간은 외국자본의 유입이 지속된다고 하더라도, 향후 미국 경제가 회복돼 미국 내 금리가 올라가면, 한국에 들어와 있던 외국자본이 급격히 빠져나갈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한국처럼 해외자본 의존도가 높은 시장에선 단기자본의 과도한 유출입을 막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고 그는 덧붙였다.

LG경제연구원 신민영 거시경제실장은 "시중에 돈이 많이 풀려 물가상승이 우려될 경우 일반적으로는 금리를 올리지만, 요즘처럼 달러화 약세 상황에서 금리를 올리면 금리 차이를 노린 단기 외국자본 유입이 더욱 늘어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수출과 물가, 급격한 외화 변동성을 모두 고려해야 하는 외환 당국과 중앙은행의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양적완화(量的緩和·Quantitative easing)

중앙은행이 고유의 기능인 발권력을 동원해 찍어낸 돈을 시중에 공급하는 정책을 말한다. 중앙은행은 국채나 회사채 매입 등의 방법으로 시중에 직접 자금을 공급해 통화량을 늘린다. 기준 금리가 '0(제로)'에 근접하면 더 이상 기준 금리를 조절하는 효과가 사라지기 때문에 양적완화가 경기 부양과 신용 경색 해소의 방법으로 쓰인다. 일본중앙은행(BOJ)은 지난 2001년 3월부터 5년간 시중 은행이 보유한 장기 국채를 매입해 양적완화에 나선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