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방울 한 방울… 가슴 적시는 虛無

'물방울 작가'로 널리 알려진 김창열 화백의 개인전 〈회귀〉가 8일부터 서울 강남구 신사동 갤러리현대 강남에서 열린다. 김 화백은 서울과 파리를 오가며 작품 활동을 벌이고 있으며, 이번 전시에는 2008년부터 최근까지 제작한 50여점의 작품이 나온다. 천자문을 배경으로 그린 영롱한 물방울은 삶의 탄생부터 소멸까지 생명의 순환을 나타내고 있다. 캔버스에는 황금에 가까운 노란색이 등장하는데, 이는 작가의 현재가 황혼이 아니라 황금기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만큼 김 화백은 작품에 여유와 충만함을 부여하고 있다.

 

김창열 화백은 1929년 대동강 상류의 강촌(江村)인 평안남도 맹산에서 태어났다. 네살 때부터 할아버지로부터 천자문을 배웠으며, 중학생 시절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김 화백은 조부와 집안의 극심한 반대에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김 화백은 서울대 미대에 들어간 이후 뉴욕으로 건너가 당시 시대를 휩쓸던 팝아트를 경험했다. 6·25 전쟁의 참상을 겪으며 〈제사〉라는 추상화를 그렸던 팝아트로 대변되는 미국의 소비주의에 적응하지 못했다. 김 화백은 다시 파리로 건너가면서 안정을 얻었고, 1972년 무렵 물방울 작업을 구상하게 됐다. 1973년 파리에서 물방울 작품의 본격적인 첫 전시가 열렸다. 김 화백은 파리의 집에 문패 대신 물방울을 그려 넣을 정도로 몰두했다.

1976년 5월 김 화백은 현대화랑(지금의 갤러리 현대)에서 귀국 전시를 열었고, 전시는 성공적이었다. 1970년대 김 화백의 물방울은 거친 마포(麻布)나 모래, 목판 위에 그려졌다. 캔버스에 밑칠을 하지 않고 거친 상태 그대로 사용하면서, 물방울과 배경인 공간의 관계를 생각하게 했다. 목판과 같이 바탕을 중심으로 보면 오브제가 될 수 있고, 물방울 자체에 집중하면 회화 작품이 되어 오브제와 그림의 경계를 모호하게 했다. 물방울은 시간이 지나면 스며들거나 증발해버리는 존재이지만, 생명의 근원으로 무한과 유한을 함께 아우르고 있다. 김 화백은 프랑스 유명 일간지 피가로지(紙) 위에 물방울을 그려 실재와 허구, 문명과 자연을 대비시켰다.

김창열 화백은 1990년대 들어서면서 〈물방울〉 대신 〈회귀〉를 표제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물방울 자체가 가지는 허와 실, 무한과 유한의 개념을 확장시킨 것이다. 작품 바탕에 천자문을 넣음으로써 이미지에 동양적 사상을 함께 펼쳤다. 작가는 어릴 적 천자문을 배우면서 어렴풋하게 느꼈던 문리(文理)의 세계와 물방울을 그려내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둘을 함께 녹여냈다. 전에는 반사광과 그림자를 넣어 물방울 자체의 영롱함을 극대화했다면 다양한 색깔의 천자문과 함께 흩뿌리기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였다. 예전에는 곧 사라져버릴지 모르는 물방울의 긴장감에 집중했다면, 이제는 스며들기나 뿌려짐 같은 인위성에 방해받지 않는 무위(無爲)를 드러낸다.

작가는 "물방울을 그리는 행위는 모든 것을 물방울 속에 용해시키고 투명하게 무(無)로 되돌려 보내기 위한 행위다. 모든 것을 허(虛)로 돌릴 때 우리들은 평안과 평화를 체험한다"고 말했다. 캔버스를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물방울의 투명함과 명료함으로 자신이 평온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전시는 11월 7일까지 이어진다. (02)519-08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