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백남준 퍼포먼스… 발레리나 강수진의 몸짓… '예술가의 순간'을 찍는 母女

"당장 나가 주세요! 그렇게 사진을 찍으면 작업할 수가 없잖습니까!"

1990년대 초, '춤의 해'를 맞아 서울에 온 세계적 비디오 아티스트 고(故) 백남준이 소리쳤다. 무대에서 퍼포먼스를 벌이던 중 터지는 플래시를 참지 못한 것이다. 모여든 사진작가들 모두 가버렸지만 이은주(65)씨는 무대 뒤에서 퍼포먼스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당시 파격적이던 백남준의 퍼포먼스에 깃든 천재성이 이씨를 흔들었다. 모든 순간을 카메라에 담고 싶었다. 퍼포먼스를 끝낸 백남준은 이씨에게 "아까는 소리를 질러 미안하다"고 했고, 그 뒤 16년간 이씨는 백남준의 사진을 찍게 됐다. 백남준 5주기를 맞아 이씨가 오는 15~23일 성남아트센터 미술관 별관에서 백남준 사진전을 연다. 뉴욕과 도쿄도 순회한다.

"내 일은 예술가들이 가장 아름답고 천재적일 때, 예술 그 자체가 되는 순간을 담는 겁니다. 그 순간을 대중과 나누려면, 초상권에 대해 예술가 본인의 허락부터 받아야 해요. 첫 만남 후 백 선생님을 찾아가 허락을 받았어요. 카메라를 들이대면 매번 '예쁘게 찍어달라'는 분이셨죠. 그러고서 정작 찍을 때는 바보 표정을 짓고, 하품을 하고, 갑자기 손을 올리기도 했어요."

이씨가 백남준을 처음 만났던 시절, 그는 무대 사진을 찍는 사진작가 가운데 유일한 여성이었다. 10년 전까지도 그랬다. 지금은 한 명이 더 있다. 이씨의 딸 최시내(36)씨다. 이 모녀가 같은 기간, 같은 장소에서 사진전을 갖는다. 최씨가 처음 여는 사진전의 뮤즈는 세계적 발레리나 강수진씨다. 사진전에 낼 사진을 보고 강씨는 "너무나 아름답다. 빠짐없이 소장하고 싶다"고 했다고 한다. 35년간 무대 위를 찍어온 이씨에게도, 숨 가쁘게 엄마의 길을 따라온 최씨에게도 사진은 쉽지 않다.

"접근 자체가 어려워요. 무대 사진을 찍으려면, 기본적으로 공연장·예술가·주최측의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어떨 때는 안무가나 협찬받은 의상 브랜드의 허락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하고요. 음악과 춤에 대한 이해는 물론, 예술가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어야 하죠. 체력도 뒷받침돼야 하고요. 화려한 겉모습에 혹해 이 일을 시작하는 제 또래들이 대개 1년을 못 버티고 그만둔 이유예요."(최시내)

10대 후반이던 최씨가 "사진을 찍겠다"며 엄마의 사진기를 들었을 때, 이씨는 "왜 이 힘든 일을…" 하며 반기지 않았다. 그러나 딸의 사진에서 '그 세대 특유의 착하고 젊은 시선'을 발견하고, 무대 위에서 맨발로 사진 찍는 딸을 응원하기 시작했다.

"사진가는 마치 공기처럼 움직여야 해요. 찍히는 사람이 눈치 채지 않게 숨소리도 내지 않죠. 그래서 맨발이에요."(최시내)

딸은 엄마의 사진에서 '깊이'를 읽는다고 했다. 최씨는 "예술가가 가장 빛나는 순간을 잡아채 앵글에 담는 엄마의 집중력이 대단하다"며 "1000장 찍어 한 장 건질 생각으로 일하는 것을 우리 디지털 세대가 배워야 할 점"이라고 했다.

딸의 말을 듣던 이씨는 "사실 외롭고 힘든 때도 많았다"고 했다. "30년 넘게 사람 얼굴을 찍으니 관상쟁이가 다 됐어요. 최고의 명성을 지녀도 겸손한 사람, 그렇지 못한 사람…. 마음속에서 자꾸 평가하게 돼요. 사진을 찍고 싶지 않은 사람도 생기고요. 그래서 딸의 존재가 고맙습니다. 젊은 시도와 의욕을 보면서 제 작업의 생명이 꺼지지 않는 것 같아서요."(이은주)

"무대는 마약과 같아요. 힘들어 그만둘까 싶다가도 어느새 사진을 찍고 있어요. 사람의 마음을 마비시키는 그 순간들을 계속 사진에 담고 싶어요."(최시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