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민의 '평점 따윈 필요없어'] 무협영화 '검우강호'… 강호 등진 고수여! 世俗도 만만치 않다네

무림을 떠난 영웅에게 현실의 삶은 결코 녹록지 않다. '검우강호'의 정징도 그리 평범한 여인이 돼보려 애썼으나 과거의 뜨거운 업보에서 한 발도 벗어나지 못한다. 운명을 깨닫게 해주는 건 늘 현실이고, 현실이야말로 가장 징글징글한 무림이다.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고수가 됐든 하수가 됐든 이미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무공을 겨루는 일이니까. 세상 어디 강호 아닌 데가 없고 협객 아닌 자가 없으니, 모두 나름 이 비정한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만의 검법을 연마하며 일급 비급을 찾아 헤매는 것 아닌가. 그러니 이름과 얼굴을 바꾼다 한들 검객이 검을 폐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도의를 위해서든 복수를 위해서든 마지막 혈전을 위해 문파의 고수들은 언젠가는 돌아오게 돼 있다. 우리의 미적지근한 피를 끓어오르게 하려고 가끔 '검우강호'같은 무협물이 도포 자락 휘날리며 돌아오듯이.

※검우강호=감독 수차오핑, 출연 양자경 왕학기 정우성 여문락, 10월 14일 개봉. 15세 관람가.

'검우강호'는 어린 시절 침을 꼴딱 삼키며 봤던 쇼브라더스 스튜디오의 무협영화들을 추억하게 만든다. 그 안에는 강호를 등진 고수와 무림절기를 지닌 여협, 아버지의 원수를 갚아야 하는 비운의 자객도 있고 심지어 오우삼 감독의 '셀프 오마주'(자신에 대한 존경)인 주인공의 '페이스 오프'도 있다. 그렇다. 명나라 시대의 메디컬 드라마도 아닐진대 영화에서 양자경이 연기한 정징의 성형수술은 매우 중요한 장치다.

강호를 피로 물들인 달마의 유해 반쪽을 차지한 전설의 여검객 세우는 이름도 정징으로 개명하고 안면윤곽수술로 얼굴까지 바꾼 후 미련 없이 검을 버린다. 천하제일의 무공을 자랑하던 그녀가 자진하여 수수한 아낙이 되어 민간에 은둔코자 한 것이다. 자, 여기서 질문 하나. 무협영화를 보면서 늘 궁금했다. 왜 최고의 경지에 오른 고수들은 결국 강호를 떠나는가. 왜 과거를 숨긴 채 가마꾼이 되고 나무꾼이 되어 산야에 은거하는가. 왜 그들은 우리 같은 비루한 범인이 되지 못해 안달인가. 과연 우리의 일상은 그들의 무림보다 아름다운가. 아니다. 그들은 절대 우리와 같은 민간인이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그 꼴은 차마 추잡하고 불쌍해서 못 봐주기 때문이다.

이를 증명하는 예로 박민규의 소설 '말 많을 절'을 들어보겠다. 여기 대천권왕 김일해, 청룡검제 최일우, 운무천마 선우진, 빙해천수 조인덕, 한때 중원을 호령했던 불사의 네 마리 용이 이 땅 대한민국에 살고 있다. 대의란 오직 돈이요 기개를 품은 남아라 해봤자 쉰 평 아파트나 꿈꾸어 보는 이 세속의 삶에서 영웅들은 어떠한 삶을 살고 있을까. 권왕은 조폭으로 오인받아 감방살이를 하고, 검제는 하필 히로시마 원자폭탄 터지던 날 무공을 가르다 바스러지고, 천마는 축지법을 쓰다 고속도로에서 페라리에 받히고, 천수는 지구온난화에 빙공을 잃고 미꾸라지 양식을 한다. 절대고수들이 우리와 같이 식민지와 전쟁, 산업화의 풍파를 겪느라 장풍 한번 시원스레 날려보지 못한 채 뒷방 늙은이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