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분석] 혼자만 쏙… '배신의 유혹'에 빠진 기업들

요즘 생명보험업계도 '죄수의 딜레마'에 빠져 살얼음판을 걷고 있다. 공정위가 지난 7월부터 생보사들이 공시이율을 결정할 때 담합을 했는지를 조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시이율이란 고객이 낸 보험료 가운데 만기 환급 등을 위해 적립해놓은 돈에 부과되는 일종의 변동금리를 말한다.

그런데 최근 자진신고자가 있다는 소문이 나돌면서 업계에서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처음에는 담합 조사를 할 것 같은 분위기가 아니어서 다들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지금은 소문을 공유하는 것까지 담합 소지가 될 수 있다고 보고 입단속을 하고 있다"면서 "당연히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리니언시 이슈는 담합 조사 때마다 불거졌다. 2007년에는 10개의 손해보험사가 5년간 일반손해보험 상품의 보험요율을 공동으로 결정한 데 대해 508억원의 과징금을 물었다. 당시 동부화재가 가장 먼저 자진신고해 과징금을 면제받았다. 총 과징금이 수천억원에 이르렀던 작년 말 액화석유가스(LPG) 담합행위가 세상에 알려진 것도 리니언시 덕분이었다. 대규모 과징금을 감당할 여력이 없던 SK에너지가 1순위 신고자였다.

◆"리니언시 차선(次善)이 없다"

리니언시 사례가 점차 늘어나자 업계에선 볼멘소리도 나온다. 동종업계의 의리가 깨지고 서로 불신이 쌓여 업무에도 차질이 생긴다는 불만이다. 실제 2007년 손보사 담합이 리니언시 때문에 탄로 나자 자진신고한 회사 사장은 업계 사장단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고 철저히 '왕따' 신세였다는 후문이다.

하지만 공정위는 담합을 잡아내는 데 리니언시만큼 효과적인 제도가 없다고 판단한다. 공정위 관계자는 "우리나라에서 만든 제도는 아니지만 정말 기막힌 제도"라고까지 했다.

우리나라 조사권이 미치기 어려운 국제카르텔도 리니언시로 잡아낼 수 있다는 설명이다. 실제로 지난 5월 국제 항공사 26개가 항공화물 운임을 일괄적으로 올린 것도 독일 국적 항공사인 루프트한자의 자진신고로 적발됐다.

리니언시는 해외 경쟁당국들도 즐겨 쓰는 수단이다. 지난 4월 기준 리니언시를 도입한 국가는 40개국이다. 미국의 경우 1순위 자진신고자에 대해선 징역과 벌금을 100% 면제해준다. 유럽연합(EU)은 1순위에 과징금을 100% 면제해주고 그다음부터는 순위별로 차등해서 과징금을 감면해준다. 2순위는 30~50%, 3순위는 20~30%, 4순위 이하는 20% 이내로 과징금을 덜어주는 식이다.

일본은 보다 강력하게 리니언시를 권장한다. 조사가 시작되기 전에는 우리나라와 같은 수준으로 면제해주고, 본격적인 조사가 시작된 후에 자진신고를 해도 1~3순위까지 30% 이하로 감면해준다.

리니언시와 관련, 담합을 주도한 기업이 신고 하나로 아무 죗값도 치르지 않아 맹점이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에 대해 공정위 관계자는 "계속 담합이 이뤄짐으로써 소비자들이 지속적인 피해를 입는 것보다는, 빨리 담합을 적발해 피해를 줄이는 것이 전체적으로 더 효과적"이라고 설명했다. 따라서 제도의 실효성이 입증된 만큼 일관된 집행이 중요하다는 지적도 있다. 남재현 고려대 교수는 "리니언시가 도입된 지 오래되지 않았고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있지만, 무엇보다 공정위의 정책이 일관성을 잃지 않아야 신뢰를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리니언시(leniency)

과징금 면제라는 당근을 줘서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담합 사실을 신고하도록 하는 자진 신고자 감면제도. 담합 사실을 처음 신고한 업체는 과징금을 전액 면제해주고 2순위 신고자는 50%를 면제해준다.

지난 14일 국내의 내로라하는 대기업인 삼성전자·LG전자·캐리어 등 3개 회사가 공정거래위원회(이하 공정위)로부터 191억원의 과징금 철퇴를 맞았다. 공공기관에 납품하는 시스템에어컨과 텔레비전 조달단가를 담합한 혐의다. 삼성전자는 175억원을 물게 된 반면, LG전자는 한 푼의 과징금도 부과받지 않았다. 공정위의 '자진신고자 면제제도', 일명 리니언시(leniency)에 따라 가장 먼저 담합 사실을 자진신고한 덕분에 과징금을 전액 면제받은 것이다.

최근 업계에선 '리니언시'에 대한 공포가 확산되고 있다. 리니언시는 담합을 통해 가격을 올리거나 부당행위를 한 업체들 중 가장 먼저 자백한 업체에 공정위가 과징금을 전액 면제해주는 제도다. 2순위 신고자는 50%를 감경(減輕)받을 수 있다.

1997년 국내에 도입된 리니언시는 2004년까지 매년 1~2건에 불과할 정도로 활용도가 낮았다. 하지만 2005년부터 매년 평균 12건 정도로 늘어나는 추세다. 그 결과, 1999년부터 올해 8월까지 공정위가 과징금을 매긴 총 219건의 담합 가운데, 3분의 1(71건)에 리니언시가 적용됐다.

이처럼 리니언시 의존도가 높아지면서 찬반도 뜨겁다. 오랜 기간 담합으로 대규모 이윤을 남기고도 자진신고만으로 죄를 완전히 씻는다는 점은 특혜(特惠)라는 지적도 있고, 동종 업계 간 불신을 조장해 질서를 어지럽힌다는 업계측의 반발도 있다.

하지만 담합을 근절하는 데 리니언시를 대신할 제도가 없다는 것이 대체적인 시각이다.

◆죄수의 딜레마 공포에 떠는 기업

리니언시는 게임이론 중 하나인 '죄수의 딜레마'(Prisoner's Dilemma)에 자주 빗대진다. 공범인 두 죄수가 먼저 자백하면 죄를 완전히 면제받을 수 있다는 제안을 받고는, 상대가 어떤 선택을 할지 고민하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