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국회 속기사 "의원님들 욕설도 그대로 기록합니다"

인사청문회와 국정감사가 잇달아 열리며 국회가 조명을 받고 있다. 그러나 누구에게서도 주목받진 않지만 국회를 묵묵히 지키는 사람들이 있다. 국회의 현장을 역사로 기록하는 속기사들이다. 26일 오후 국회 속기사 경력이 올해로 각각 10년과 20년이 된 국회사무처 의정기록 1과 소속 백순정(41)·박윤혜(36) 속기주사를 만났다.

역사를 기록하는 그들의 방식

속기사는 크게 수기(手記) 속기사와 컴퓨터 속기사로 구분한다. 1995년 컴퓨터 속기가 보급된 후 수기 속기사의 수는 점차 줄어들고 있다. 현재 국회사무처 소속 속기사는 총 75명으로 이 중 컴퓨터 속기사는 52명, 수기 속기사가 23명이다.

이들의 속기는 일반인이 타자를 치거나 필기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속기사들은 "속기를 배우는 것은 새 언어를 배우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했다.

수기 속기는 발언 내용을 B5 크기의 노트에 손으로 받아적는다. 수기 속기사인 백씨의 노트를 열어보자, 노트에는 아랍어처럼 보이는 글씨로 가득했다. 수기 속기는 '가'를 '/'로 , '/'를 길게 쓰면 '기'가 되는 등 모든 문자를 기호로 바꿔 쓴다. 전문(全文)을 쓰기에는 시간이 촉박하기 때문이다. 10분 정도의 발언을 기록한 기호를 글자로 바꾸는 데는 1시간이 걸린다. 컴퓨터 속기사가 전체 속기사의 3분의 2를 넘지만 수기 속기는 여전히 쓰임새가 많다. "전기가 없는 건물 밖이나 마이크가 없어 발언자 옆에서 기록해야 하는 상황 등에는 수기 속기가 꼭 필요하죠." 20년째 수기 속기사로 근무하고 있는 백 속기주사의 말이다. 기호를 완벽하게 체화(體化)한 속기사가 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연습이 필요하다. 백씨는 "'최고의 속기사가 되기 위해서는 연습한 갱지가 자신의 키만큼 쌓여야 한다'는 말이 있다"고 했다.

컴퓨터 속기는 일반 컴퓨터의 키보드 모양으로 생긴 특수 컴퓨터를 이용한다. 이 컴퓨터 1대의 가격은 400만원이 넘는다. 수기 속기와 달리 컴퓨터 속기는 기호를 글자로 바꾸는 과정이 필요 없다. 컴퓨터 속기사 박씨가 'ㅇㅈㅎ'라고 써 있는 자판을 동시에 누르자 기계 위 작은 화면에 자동으로 '존경하는'이라는 글자가 입력됐다. 박씨는 "속기 컴퓨터에 들어 있는 메모리 카드를 일반 컴퓨터로 옮긴 후 띄어쓰기와 오타를 수정하면 정확도가 98%를 넘는다"고 말했다. 현재 미국에서는 목에 거는 휴대용 속기 컴퓨터가 이용되고, 우리나라에도 휴대용 속기 컴퓨터가 보급되고 있어 수기 속기가 설 자리는 점차 좁아지고 있다.

"의원들 수준 많이 올라…쇼맨십은 자제를"

속기사들 사이에서는 "속기사가 '별로'라고 평가한 의원이 재선하는 경우는 없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지근거리에서 그들의 언행을 지켜보기 때문이다. "1990년대 초만 해도 의원들이 하루종일 질문 내용만 주절주절 읽고 답변은 서면으로 대체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요새는 회의가 1문1답으로 알차게 진행되고 있어 '국회 수준이 많이 높아졌구나' 하고 느껴요." 백 속기주사는 "의원들의 전문성이 많이 높아지긴 했지만, 쇼맨십이 너무 심해진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고 했다.

속기사들을 힘들게 하는 것은 발언자의 알아듣기 힘든 발음과 작은 목소리다. "마이크가 꺼진 후에도 한 의원이 계속 발언을 해 입모양을 쳐다보며 기록을 하는데 회의가 끝난 후 행정실 직원이 '왜 의원님을 째려보냐'고 하더라고요." 박씨는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크게 웃었다.

백 속기주사는 "기록에 남기길 원치 않는지 입을 가리고 말하거나, 일부러 마이크 옆에서 말하는 관료도 있다"고 했다. 임시회의록이 나온 후 "나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삭제해 달라", "왜 내가 한 말을 넣지 않았느냐"고 하는 의원들도 종종 있다. 박 속기주사는 "직접 녹음 내용을 들려준 후 불만을 수그러들게 하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국회에서는 말다툼과 몸싸움 등의 돌발상황이 발생하는 경우도 있다. 백 속기주사는 "물리적으로 기록하는 게 불가능한 상황이 있다. 그럴 땐 회의록에 '장내 소란', '청취불능'이라고 쓸 수밖에 없다"고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안이 통과된 후에는 신발이 날아오고 회의장이 울음바다가 돼 회의가 끝난 후 얼른 도망나왔어요. 그때 기억은 잊을 수 없죠." 백씨가 당시를 회상하며 말했다.

말다툼이 심해져 의원들 사이에서 욕설이 오가는 경우도 있다. 의정기록과 권영찬 서기관은 "예전엔 '개새끼'라는 발언 등 욕설이 더러 나와 '○○○'으로 기록한 적도 있다"며 "요즘은 발언한 그대로 기록하고 있고, 욕설하는 의원도 보기 드물다"고 했다. 권 서기관은 또 "삭제가 가능하리라고 생각하는 의원들이 있지만 의회기록은 절대 삭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크리스마스와 새해도 국회에서

국회 속기사들은 한 상임위원회에 약 2년간 배치된다. 뉴스 흐름을 따라잡는 등 전문성을 확보해주기 위해서다. 원칙적으로는 주5일 근무이지만 주말과 휴일에 회의가 있으면 속기사들은 어김없이 자리를 지킨다. "예산안 처리가 크리스마스와 새해에 몰려 있어, 이런 명절을 가족과 보낸 적이 지난 10년간 두 번밖에 없어요. 동료들과 국회에서 재야의 종소리를 듣죠." 자리에 꼿꼿이 앉아 온 신경을 집중해 기록해야 하는 속기사들은 허리나 목, 손목 관절에 이상이 자주 생기고, 늘 이어폰을 꽂고 있는 귀에도 무리가 많다.

그렇지만 사관(史官)으로서의 자부심은 크다. "국회에서 일하며 세상의 중심에 서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많아요. 우리가 기록한 게 모두 역사로 남는 거잖아요." 박 속기주사가 웃으며 말했다. 속기사들이 기록한 국회회의록은 연말에 책자로 발간돼 보관된다. 1권에 600~1000쪽에 달하는 국회회의록은 제헌국회부터 지금까지 2260권이 발간돼 중요한 사료(史料)로 보존되고 있다.

국회 속기사가 되려면 속기자격증 공인 3급 이상을 취득한 후 국회사무처가 시행하는 국가공무원 임용시험에 합격해야 한다. 올 11월에 5명을 채용할 예정으로 경쟁률은 30:1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