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 [메트로 이 사람] "전시 내보낼 땐 딸 시집 보내는 기분"

'소인국'이 눈앞에 펼쳐졌다. 서울 마포구 서교동에 위치한 ㈜기흥성의 고즈넉한 적색 벽돌 건물 1층 전시실은 미륵사지 9층 목탑(50분의 1 축소)과 백제 사비궁(20분의 1), 경복궁(8분의 1)에서부터 제주도 중문단지(1000분의 1)까지 150여점의 모형 작품들로 가득했다.

모형 아트 대가(大家)인 ㈜기흥성의 기흥성(72) 회장은 "작품을 완성하고 나면 엄청 서운해요. 열정을 쏟았다가 어디로인가 전시하러 보내면 뿌듯하기도 하지만 딸 시집 보내는 듯한 기분이 든다"고 말했다.

인천공항, 포항제철 등 국내 건축 모형뿐 아니라 중국 당나라 장안성 복원 모형, 2010년 남아공 월드컵경기장 모형, 파리 에펠탑 모형 등의 대작(大作)이 그의 손을 거쳤다.

지난 1989년 만든 롯데월드 민속박물관 내 1200㎡ 규모의 모형촌에는 경복궁 등 궁궐과 향교·사찰 등 각종 모형 건축물들이 재현돼 있다. 이곳은 전 세계 귀빈들이 한국을 방문할 때 단골로 찾는 명소이기도 하다.

기 회장은 작년 12월 우리나라가 아랍에미리트연방(UAE)에서 400억달러 규모의 원자력발전을 수주하는 데도 일조(一助)했다. 그가 만든 200분의 1 축소 한국형 신형원자력 발전소 모형은 우리의 원자력 발전소를 정교하게 표현해 우리 기술력을 돋보이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건축 모형은 실제 건축물을 짓기 전, 완공 뒤의 모습을 미리 살펴보고 주변과 잘 어울리는지 등을 예측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건설사들이 아파트·빌딩 등을 분양할 때도 많이 사용한다. 지금은 사라진 황룡사 9층 목탑이나 조선총독부 건물 모형 등은 교육용으로도 사용되고, 금강산·백두산 모형같이 순수 전시용으로 만들어지는 것들도 있다.

기 회장은 "고층 빌딩 등 건축물은 아크릴 종류로, 고(古)건축물은 목재 등을 주 원료로 사용한다"며 "조각도와 드릴, 레이저 조각기 등 각종 도구를 동원하고, 수성·유성 도료 등으로 색을 입혀 주변 조경까지 섬세하게 마무리하는 작업을 거친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 2000년 '평양을 서울에 옮겨온 사나이'로 불리기도 했다. 당시 남북정상 회담 즈음해 평양시내 주요 건물과 자연경관을 대형 입체 조형물(가로·세로 5m)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1993년 대전 엑스포에서는 금강산(10×20m)과 백두산((10×10m) 모형을 만들어 북한 물산관에 전시하기도 했다. 당시 백두산 천지물을 직접 공수해서 모형 백두산 천지에 붓는 행사를 열기도 했다.

1938년 황해도 옹진 출신인 그는 1950년 6·25 전쟁 때 남한행을 택했다. 학창시절부터 "손재주가 많다"는 말을 듣던 기 회장이 모형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은 1967년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에 입사했을 때부터다. 당시 최고 건축가 중 하나로 꼽히던 김수근 수석부사장이 그가 만든 무역박람회장 모형을 두고 "'귀신같은 놈'이 한국에도 나타났다"며 칭찬을 했다고 한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는 제가 대통령 브리핑의 '마지막 구원투수' 역할도 많이 했죠."

한창 각종 개발이 이뤄지던 박 전 대통령 시절, 당시 대통령 앞에서 브리핑에 나서던 공무원과 건축회사 등에서는 앞다퉈 기 회장에게 일감을 발주했다. 대통령 브리핑 자리에서 기 회장의 모형을 보여주는 것보다 한눈에 개발 계획을 알기 쉽게 설명하는 방법은 없었기 때문이다. 경부고속도로, 여의도 종합개발계획 등의 모형이 그의 손에서 탄생했다. 기 회장은 "당시에는 사무실에 야전 침대를 가져다 놓고 밤을 새우면서 잠깐씩 사무실에서 눈을 붙였다"고 말했다.

1992년 건국대학교에서 처음 학생들을 지도한 이래, 상명대, 계원디자인예술대, 국민대 등의 강단에 섰고, 2004년에는 중국 칭화대 교수에 위촉돼 3년간 중국 학생들에게 우리의 모형 기술을 전수하기도 했다. 당시 칭화대가 기 회장의 전시회까지 마련해줬는데, 황룡사 9층 목탑, 서울시 전경, 월드컵 경기장 모형 등 대형작품 20여점은 중국 사람들까지도 감탄하게 만들었다.

기 회장은 "지금까지 만든 작품들을 한꺼번에 전시하고, 건축 모형을 만드는 사람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모형박물관을 만드는 게 꿈"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