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가 '11월의 역설'을 아세요?

'11월의 역설'이 있다. 11월은 일년 중 관객들의 극장 나들이가 가장 적은 편에 속하는 비수기. 당연히 큰돈 들인 대작 영화는 이 계절을 외면하고 여름과 겨울을 선택한다. 대신 초대형 블록버스터에 움츠렸던 영화들이 비온 뒤 죽순처럼 기지개를 켠다. 극장 입장에서는 우울한 계절이지만 영화팬들 입장에서는 고마운 이유다. 게다가 올해 11월은 유난히 중년 관객을 위한 다채로운 빛깔과 무늬의 외화가 많다. 10~20대 관객 위주로 상업영화 제작시스템을 구축해온 충무로에 분노했던 중년 관객이라면 놓칠 수 없는 기회이기도 하다. 5편을 추천한다. 모두 이 영화를 소개할 수 있어 행복한 작품들이다.

▲단 한 편만 꼽으라면

감독도 배우도 낯설다. '아바타'처럼 눈이 휘둥그레질 볼거리도 없다. 하지만 이 가을, 단 한편밖에 추천할 수 없다면 주저 없이 이 영화를 선택하겠다. 아르헨티나 감독 후안 캄파넬라가 만든 멜로 '엘 시크레토-비밀의 눈동자'. 삶에 대한 감독의 성숙하고도 지적인 시선에 경의를 표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30년에 걸친 대서사시. 강간살인사건으로 아내를 잃은 모랄레스와 은퇴 후에도 이 사건의 진실을 추적하는 검찰 수사관 에스포지토를 통해 사랑과 인생의 의미를 묻는다. 지난 2월 아카데미가 '외국어영화상'으로 그 감동을 인증했고, 눈 밝은 할리우드는 최근 리메이크를 결정했다.

▲함께 늙는 액션배우를 가진 행복

브루스 윌리스의 올해 나이는 쉰다섯. 하지만 여전히 치고 부수며 달린다. 이번 '레드'에서는 역전의 노장들이 함께 뭉쳤다. 모건 프리먼, 존 말코비치, 헬렌 미렌. '연기 올림픽'이라도 열린다면 모두 금·은·동메달을 다툴 선수들이다. 과거의 패악을 은폐하려는 미국 부통령을 사이에 놓고 전직 CIA 특수요원들과 현 CIA가 한판 승부를 벌인다. 넘어지고 피 흘리는 브루스가 종종 안쓰럽지만 시종일관 유쾌하고 박진감이 넘친다. 함께 늙어갈 수 있는 액션배우를 가진 세대의 행복이다.

▲눈물의 카타르시스를 맛보고 싶다

'중국의 스필버그'라는 별명의 펑샤오강 감독은 중국 상업영화의 거장. '대지진'은 울음의 급소를 명확하게 짚는다. 초강력 신파라는 일부의 비아냥도 있지만 웬만해선 실화에 바탕을 둔 대하드라마의 압도적 감동을 배겨낼 재주가 없다. 27만명의 생명을 앗아간 탕산대지진(1976년)을 후경으로 제시한 뒤 축대에 깔린 쌍둥이 중 아들만 살려야 했던 엄마의 비극적 인생을 전경에 담아낸다.

▲비명과 신체 훼손이 없는 호러

'식스 센스'(1999) 이후 '반전의 제왕'에 등극했던 나이트 샤말란은 최근 몇 년간 극심한 슬럼프에 시달려 왔다. 모두가 그를 한물갔다고 했다. 하지만 이번 영화 '데블'은 샤말란이 초심으로 돌아갔다고 평가해도 과언이 아닐 듯한 군더더기 없는 작품. 연출은 존 에릭 도들에게 맡겼지만 샤말란이 프로듀서를 맡고 스토리 초안을 짠 사실상 샤말란의 작품. 필라델피아 고층 빌딩 엘리베이터 밀실 안에서 벌어지는 연쇄살인을 통해 신과 악마의 존재 그리고 인간의 죄의식을 묻는다. 요즘 공포 스릴러의 유행처럼 되어버린 신체 훼손과 자극적 소음을 최소화했다는 점도 반갑다.

▲다시 사랑할 수 있다면

더스틴 호프만과 엠마 톰슨 커플을 스크린에서 만나는 것만으로도. '하비의 마지막 로맨스'는 이번 기회가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연애를 시작하는 케이트(엠마 톰슨)와 하비(더스틴 호프만)의 중년 로맨스다. 마흔에는 마흔의 사랑이 있고, 쉰에는 쉰의 사랑이 있는 법. 중년에도 사랑은 현재진행형이라고 선언하는 이들의 체온이 객석에도 포근하게 전해진다. 원숙의 경지에 이른 두 배우가 빚어내는 연기 앙상블은 10분이 멀다 하고 마법적인 순간들을 만들어낸다. 이 커플이 있어 이 가을이 따뜻하다.

[중년을 위한 영화 5편]

엘 시크레토-비밀의 눈동자(멜로, 스릴러)
25년 전 살인사건으로 시작된 사랑과 복수.

감독: 후안 호세 캄파넬라
주연: 리카도 다린, 솔레다드 빌라밀
11월 11일 개봉. 15세 관람가
단평: 이 가을, 단 한 편만 꼽는다면. ★★★★☆

데블(공포)
필라델피아 고층 빌딩 엘리베이터에서의 밀실 살인.

감독: 존 에릭 두들
주연: 크리스 메시나, 제프리 아렌드
11월 4일 개봉. 15세 관람가
단평: 피와 욕설 없이도 호러가 가능하다는 모범 사례. ★★★

대지진(휴먼 드라마)
축대에 아들, 딸 쌍둥이가 동시에 깔렸다. 한 사람만 살려야 한다면.

감독: 펑샤오강
주연: 쉬판, 장궈창, 장징추
11월 4일 개봉. 전체 관람가
단평: 스펙터클보다 한 가족에게 초점을 맞춘 탕산 대지진(1976). ★★★

하비의 마지막 로맨스(로맨틱 코미디)
청춘의 열정이 사라진 중년에게도 사랑의 기회가 남아 있을까.

감독:조엘 홉킨스
주연:더스틴 호프만, 엠마 톰슨
10월 28일 개봉, 전체 관람가
단평: 더스틴 호프만과 엠마 톰슨의 로맨스를 스크린에서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

레드(액션)

은퇴한 CIA 요원들이 다시 뭉쳤다, 현 CIA에 맞서

감독:로베르토 슈벤트켄
주연:브루스 윌리스, 모건 프리먼, 존 말코비치, 헬렌 미렌
11월 4일 개봉. 15세 관람가
단평:노장의 액션과 연기 올림픽.
★★★☆(별 5개 만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