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민의 '평점 따윈 필요없어'] '첫사랑' 로미오·줄리엣 결혼했다면 잘 살았을까

10대 시절 첫사랑과 결혼한 커플의 이혼율이 높다는 미국의 통계가 있다. 성춘향과 이몽룡, 로미오와 줄리엣, 피 끓는 이들이 과연 결혼해 잘 살았을까 생각해 보면 쉽게 짐작이 갈 듯.

첫사랑은 빠지기는 쉬우나 유지 보수는 어렵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평생 첫사랑만 있다면 여행 한 번 못 가보고 한 동네 쭉 사는 것과 비슷한 기분이지 않을까.

현실이 어떻든 사람들의 첫사랑 편애는 유별나다. 온통 순수한 이미지로 포장해 그 상처마저 달콤하게 회상한다. 영화 '이파네마 소년'은 그 어렴풋이 떨리는 첫사랑의 데자뷔 같은 작품이다.

한적한 바닷가, 모딜리아니의 그림을 닮은 길쭉하고 신비한 소년과 그를 몰래 훔쳐보는 소녀가 있다. 예쁜 화면에는 파도소리와 그들의 설레는 숨소리가 가득하지만 어쩐지 소년은 소녀에게 온전히 마음을 열지 못한다. 소년은 헤어진 첫사랑 여자 친구를 끊임없이 회상한다. 지금 한여름의 바닷가에서 지난겨울 잿빛 풍경 속으로 사라진 그녀를 찾는다.

소년은 사라지는 기억들이 안타깝기만 하다. 사랑은 꿈속에서나 영원한 것이기에 그는 다른 사람의 꿈으로 들어가는 작은 문이 있다는 바다 속에서 헤맨다. 한마디로 우리의 멋진 소년은 여러 사람 피곤하게 만드는 첫사랑 순종주의자였던 것이다.

소년처럼 시간의 흐름 속에 부패하는 기억을 신선하게 저장하고 싶은 이들에게 소개하고픈 곳이 있다. 배우자와 애인 몰래 첫사랑의 추억을 보관하는 '첫사랑 표본실'이 그것이다. 표본실의 청개구리도 아니고 표본실의 첫사랑이라니, 말이 되느냐고?

오가와 요코의 소설 '약지의 표본'을 읽어보면 말이 된다. 소설 속에는 사랑하는 이와 관련된 중요한 물건들을 시험관에 봉인시켜 보관하는 표본실이 나온다. 가령 이런 시스템이다. 헤어진 작곡가 애인이 선물한 곡의 표본을 부탁하며 악보를 가지고 온 여자가 있다. 표본 기술사는 이제는 우주 밖으로 사라질 그 가여운 사랑의 '소리'마저도 표본으로 만든다. 한 아이는 집에 불이 나 아버지, 어머니, 동생을 잃은 후 잿더미에서 발견한 나란히 붙은 버섯 세 개를 가져온다. 덧없이 사라질 어느 순간을 영원의 시간 속에 집어넣는 것이다. 우리가 간직하고 싶은 것들이 실은 잊어야 할 것들인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잊을수록 또렷해지고, 잃을수록 새로워지는 첫사랑의 기억들처럼.

※이파네마 소년=감독 김기훈. 출연 이수혁, 김민지. 11월 4일 개봉. 12세 관람가.